송승환의 연기 투혼, 배우는 연극 안에서 살아 숨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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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유창선의 오십부터 예술로날드 하우드 원작, 송승환 주연의 연극 '더 드레서'가 국립정동극장에서 3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영국 어느 지방의 한 극장에서 셰익스피어 극단의 ‘선생님’과 함께해 온 노먼과 노배우 ‘선생님’, 그리고 연극을 만드는 여러 스태프와 배우들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등장하는 어느 인물도 긍정적이지만도 부정적이지만도 않다. 저마다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자신의 일을 해나가고 있다. 그래서 리얼리티가 살아있다.
연극 , 국립정동극장
무대감독 맷지는 "현실을 직시하라"며 공연을 취소하자고 한다. ‘선생님’의 연인이자 상대역인 ‘사모님’은 선생님에게 은퇴까지 권유한다. 그러나 ‘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온 노먼은 물러서지 않고 공연을 그대로 준비한다. 오락가락하던 선생님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공연은 차질 없이 한다고 잘라 말한다. "하고 말고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야. 이건 내 의무야. 난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나이가 들어서도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 너무 늦은 것은 없다는 것, 이 얘기야말로 우리가 인생에서 잊어서는 안 되는 말이 아니던가. 꿈을 간직하고 꿈에 도전하는 인생의 소중함을 말한다. 그러니 100분 동안 관객들은 연극이 아닌 인생을 보게 된다.
알다시피 주연을 맡은 송승환은 여러 해 전에 황반변성과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력이 급격히 나빠져서 시각장애 4급 판정을 받았다. 눈앞의 세상이 안개가 가득 낀 것처럼 보인다는 송승환은 그나마 사람의 형체는 흐리게 식별할 수 있기에 다시 연기의 투혼을 발휘하고 있다. 앞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아 귀로 대본을 외우고 무대 위에서 발걸음 숫자를 세며 이동하며 연기를 한다.
그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연기만 보면 아무런 어색함을 느끼지 못한다. 신체적 불편함이 드러나지 않도록 연습을 철저히 했다는 얘기가 된다. 시각장애의 어려움 속에서도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연기를 해내는 송승환이 바로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배우가 아닐까. 그러니 그의 인생은 이미 아름답다.
<더 드레서> 극 중에 "버티고 살아낸다"라는 대사가 유난히도 자주 나온다. 그 말은 연극의 대사이기도 하고 시각장애를 견뎌내며 연기를 하는 배우 송승환의 얘기이기도 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얘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일상이 깨지고 문명이 위협당해도... 저희 배우들은 목숨을 걸고 또 다른 싸움을 합니다. 저희에게 진정 주어진 일은 위대한 연극 작품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극 중 공연인 ‘리어왕’ 커튼콜에서 ‘선생님’의 대사다. 어디 배우들만 그럴 일이겠는가. 불안한 시대를 살면서도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 모두의 얘기이다. 배우는 위대한 연극 작품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우리는 인생 안에서 살아 숨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