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에르메스를 향유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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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한국신사 유람일기사랑하는 이를 위한 최고의 선물을 고르라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떠오르는 브랜드가 있다. ‘명품(名品)’이라는 호칭에 완벽한 자격을 갖춘 에르메스다.
고품질의 마구 생산으로 시작하여
현재 최고급 패션 브랜드로 자리잡은 '에르메스'
가치있는 사치, 에르메스를 향유하는 방법들
그럼에도 그 선명한 빛깔이며 꼼꼼한 만듦새, 하나하나 그 자체로 온전한 기물로서 오롯하게 완성된 에르메스의 섬세한 공예품은 나와 당신의 마음을 울렁이며 들었다 놓는다. 돌아서 문을 나서도 여전히 눈앞에 어른거리며 때론 꿈에도 등장해 거듭 통장 잔고를 확인하게 만들곤 한다.
네이밍에서부터 느껴지는 에르메스의 존재감
서양의 역사와 문화가 익숙한 이들에겐 에르메스 하면 자연스레 그리스 신화 속 전령(傳令), 상거래의 신인 헤르메스(Hermes)를 떠올리게 된다. 사실 브랜드 이름은 창립자인 티에리 에르메스(Thierry Hermès)의 성에서 따온 것이니 그리스 신화 속 캐릭터와의 관계성은 전혀 알려진 바 없지만 신들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이곳저곳 자유롭게 여행하던 에르메스의 캐릭터는 초창기 마구를 만들던 브랜드의 시발점과 묘하게 잘 들어맞는다.
하지만 오매불망 그렇게 바라기만 하는 것은 에르메스에 대한 예의가 아니리라. 언제부턴가 해외를 향하는 기회에 파리나 피렌체, 밀라노, 뉴욕과 도쿄 같은 큰 도시에선 꼭 한 번씩 매장에 들러 에르메스의 스카프를 확인하는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습관도 생겼다. 보통의 남자들과는 다르게 커다란 스카프를 즐겨 매니 매장마다 다르게 공급되는 스카프 중에 꼭 맘에 드는 녀석을 골라 딸에게 물려주겠다는 심산으로 하나둘 컬렉션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꼭 목에 두르는 것 말고도 에르메스 스카프를 향유하는 방법이 하나 더 있는데, 가깝게 지내는 일본의 유명한 맞춤 슈트 재단사가 들려준 에르메스 스카프의 활용법도 들어보시라.
1,000만 원을 호가하는 그의 슈트를 계절마다 맞춤하러 오는 중요한 고객이 있는데 매번 에르메스 스카프를 하나씩 사 들고 온단다. 슈트 맞추는데 에르메스 스카프를 왜? 매끄러운 실크 원단을 슈트의 안감으로 사용하려는 목적이란다. 누군가에게 화려한 실크 스카프를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옷을 입는 순간, 눈의 즐거움을 느끼려고 형형색색의 스카프로 내부를 장식한다니. 필자 같은 범인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세계 최고의 재단사에게 맡겨진 최고급 스카프 그리고 그 둘의 조합으로 탄생하는 슈트를 입는 기분은 어떨지 기분 좋은 상상을 하곤 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에르메스는 생각보다 깊숙이 곁에 와 있는 것 같다. 언제부턴가 주말을 반납하고 말에 오르는 일이 인생의 낙이 되어버린 골드 미스 여동생은 승마를 즐긴 지 몇 년째 되던 해 벼르고 벼르던 에르메스의 안장을 집으로 들였다는 게 생각났다. 오라비가 디자인한 옷이 날개 돋친 듯 팔리면 네 몫으로 꼭 에르메스 안장을 선물하겠노라 선언했던 약속은 무색해졌으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위해 최고 품질의 제품을 선택해 즐기는 모습은 유난한 과시라기보다 가치 있는 사치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메스를 누리는 또 다른 방법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이가 최고로 좋은 제품을 내키는 대로 사용할 수는 없을 것이니, 필자가 한 푼 돈 들이지 않고 에르메스를 향유하는 한 가지 방법을 슬쩍 공개할까 한다. 바로 쇼윈도 탐방이다. 언제부턴가 도산공원 근처 에르메스 서울 메종을 지날 때면 전화기를 꺼내 들고 카메라 셔터를 꾹꾹 누르게 되었다. 알록달록한 에르메스의 제품을 활용한 쇼윈도 디스플레이는 천진난만한 어린이 같은 상상력과 화려하고 영롱한 컬러로 가득했고 이를 볼 때마다 행복 호르몬이 뿜어져 나오곤 했다.
기나긴 코로나 팬데믹 때도 홀로 산책하러 다니다 들여다보던 에르메스의 쇼윈도에서 얼마나 힐링 되었는지 모른다. 떠나지 못하고 매여 있는 현실을 어루만져주며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펴게 해주었고, 생각지도 못한 과감한 컬러의 조합은 컬러 활용에 관한 생각의 틀도 넓혀주었다.
그러다 자칫 촌스럽고 유치할 수 있을 발상을 정교한 완성도로 커버한 수준 높은 쇼윈도 디스플레이가 계속 반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조사해 보니 잭슨홍이라는 작가의 작품이었고, 결국 그의 개인전을 일부러 찾아가기도 했다. 지금 내 사무실에 에르메스의 선명한 오렌지색을 담은 잭슨홍의 작품이 한 점 걸려 있는 것을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에르메스에게 이런 영향을 받았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 또한 어찌 보면 에르메스를 제대로 향유하는 방법이 아닐까.
사실 이 방법 말고도 에르메스를 향유하는 방법은 더 있다. 에르메스의 사회 공헌 프로그램인 아트 프로그램을 즐기는 것이다. 요즘처럼 좋은 전시가 흔하지 않던 시절부터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은 재능 있는 한국 작가를 선정해 왔는데 수상자의 리스트를 확인하면 재단의 심미안에 놀라게 된다. 대가의 반열로 들어선 훌륭한 작가를 발굴해 상을 수여하고 지원과 함께 유명세를 선사하며 대한민국 미술계가 풍성하게 성장하는 데에 기여한 바가 크다.
놀라운 퍼포먼스로 풀어내는 제품 전시회도 ‘과연 에르메스’라는 칭찬을 아낌없이 던지기에 충분하다. 매 시즌 지인들의 SNS 계정을 도배하듯 채우는 에르메스의 참신하고 예술적이며 완전무결한 이벤트는 많은 이의 위시 리스트 일 순위에 올라와 있다. 이렇게 글을 통해 애정을 드러낸 필자에게도 올해부턴 초대장이 도착하길 바라본다.
에르메스가 지금의 왕국을 건설하기까지 공들여온 타협 없는 크래프트맨십, 광고보다는 제품에 쏟아온 헌신, 유명인보다는 예술 그리고 작가를 지원하는 사업에 쏟아온 관심이 이룩한 우아함을 모두가 향유하면 좋겠다. 값비싸고 희귀한 고급스러움을 위해 쏟아부어진 희생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명품을 소유할 자격을 갖춘 게 아닐까. 그런 마음가짐으로 에르메스를 바라본다면 모두가 신발과 모자에 날개를 단 진정한 에르메스 향유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신사 이헌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