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기억'…연표 빼고 '스토리' 넣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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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인터뷰
전시 패러다임 바꾸는 김재홍 국립중앙박물관장
역사는 친절하게 알려줘야
딱딱한 설명과 연대표론 못 전해
실감 영상·AI 등 신기술 도입
에스컬레이터도 '전시 시설'
휴대폰 내려놓고 시선 돌리면
경천사지 십층석탑 '진가' 보여
비엔나1900展 기억에 남아
역까지 이어진 대기줄에 놀라
고려 상형청자전과 시너지 효과
▷취임 후 9개월이 흘렀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가 뭔가요.
“이달 초 폐막한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비엔나전)입니다. 폐막 직전에는 전시실부터 지하철역 입구까지 줄이 늘어섰어요. 에곤 실레와 구스타프 클림트는 대단한 거장이지만 사실 인상주의 화가들에 비해서는 국내 인지도가 떨어지잖아요. 그런데도 관람객들의 관심이 이렇게 높은 걸 보고 ‘한국인의 문화에 대한 관심과 소양이 이렇게 높아졌구나’ 생각했습니다.”
▷박물관이 왜 해외 작가의 전시를 하느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해외에서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묶어 뮤지엄(museum)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부릅니다. 모든 것이 뒤섞이는 융합 시대인데 박물관이라고 해서 전통문화, 우리 유물만 보여줘야 한다는 법은 없어요. 시너지 효과도 있습니다. 비엔나전과 함께 고려 상형청자 특별전이 열렸는데, 두 전시를 다 본 관람객들 사이에서 ‘서양 명화들을 보고 나서 우리 유물을 보니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한국적인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을 말합니까.
“과거에는 한국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이 고졸미(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데서 나오는 아름다움), 소박미에 있다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화려한 신라 금관, 고구려 건축과 비석의 웅장함, 백제의 정교한 금속 공예처럼 다양한 매력이 속속 드러나면서 국내외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 한국의 아름다움은 ‘다양성’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교와 유교 등 다양한 종교, 중국·몽골·흉노 등 주변의 여러 문화를 받아들여 흡수하면서도 우리만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다양한 아름다움을 만들었으니까요.”
“젊은 세대가 서양 문물에 익숙한 게 첫 번째 이유지만, 이들에게 역사를 잘 설명하려는 박물관의 배려가 부족했던 측면도 있어요. 박물관은 유물을 통해 국가와 공동체의 기억을 되살리고, 이를 현재와 연결시키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 기억을 ‘잘’ 전달하는 게 중요해요. 요즘 세대에 맞춰 역사를 친절하게 알려주려는 노력이 있어야 역사와 유물도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2월 선사·고대관을 개편하면서 유물 설명에 스토리텔링 요소를 강화했습니다. 연대표도 전시장에서 뺐고요.”
▷반발은 없었나요.
“박물관에 전화해서 연표가 왜 없어졌냐고 물어보는 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물관도 바뀌어야 합니다. 물론 유물은 잘 보존하고 유지해야 합니다. 다만 유물을 돋보이게 하는 주변의 설명과 장치는 계속 바꿔야 합니다. 새로운 세대를 위해서는 새로운 설명이 필요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늘 학예연구사들에게 ‘의상대사처럼 치열하게 공부하고 원효대사처럼 대중적으로 쉽게 설명하라’고 합니다.”
▷올해 박물관이 여는 ‘이순신 전시’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보통 이때까지 이순신 장군 전시라고 하면 난중일기를 펼쳐서 보여주는 단순한 책 전시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인간 이순신과 당시 시대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전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바다에서 건진 조선의 화포, 도검, 임진왜란과 관련 된 회화작품까지 다양한 유물을 보여줄 생각입니다.”
▷이순신전 개최는 어떤 의미를 지니나요.
“이순신은 일본의 침략을 격퇴한 영웅이면서 조선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순신을 조명하는 작품이나 사업이 가장 많았던 시기가 이순신 사후 200년 가까이 지난 조선시대 정조 때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어요. 그런 이순신을 집중 조명해 우리 정체성을 되새기자는 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이순신이 품었던 국난 극복과 평화에 대한 염원을 되새겨보자는 것입니다.”
▷6월 열리는 ‘조선 전기 미술’ 전시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세요.
“비슷한 맥락인데, 조선 전기는 지금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형성된 가장 중요한 시기 중 하나입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는 등 우리 민족의 전성기처럼 언급되고 있지요. 그런데 이 시기의 미술은 제대로 조명된 적이 없습니다. 신라 하면 불교 조각, 고려 하면 청자가 있는데 조선은 주로 후기에 나온 미술만 거론됐습니다. 이번 기회에 조선 전기의 미술을 종합적으로 보여주고 그 시대를 조명하려 합니다.”
▷질 높은 전시를 열기 위해 상설전시를 유료화하고 특별전 티켓 가격을 올리자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국민의 것이니 국민이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겠지요.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대부분의 국민은 그걸 원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제가 신라사 전공인 만큼 처음에는 금관 등 화려한 장식품들을 조명하는 ‘황금의 방’을 만들까 생각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이런 유물들은 워낙 뛰어나게 아름다워서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아도 주목받을 수 있어요. 대신 저는 스토리텔링과 실감 영상 등 신기술을 통해 이때까지 주목받지 못한 의궤, 금석문, 활자와 같은 것들의 매력을 더 잘 보여주는 데 주력하려 합니다.”
▷관람객들에게 꼭 봐야 할 유물을 하나 추천한다면.
“로비에 있는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들 탑 아랫부분만 보고 넘어가는데, 사실 윗부분이 더 화려하고 아름답거든요. 찬찬히 올라가면서 감상할 수 있도록 에스컬레이터 옆에 배치했는데, 에스컬레이터에 탄 분들은 휴대폰만 보시더라고요. 에스컬레이터에서 보는 탑, 2층과 3층에서 보는 탑이 모두 다르니 눈여겨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한자 土 옆에 점 하나…1000년 넘게 이어진 장인의 '사소한 버릇'
김 관장이 강조한 '스토리텔링'
김재홍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유물과 관련한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기자를 ‘호우총 청동그릇’ 앞으로 이끌었다. 호우총 그릇은 5세기 고구려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그릇으로,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출토됐다.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밀접한 관계를 알려준다는 중요성 때문에 한국사 교육과정과 각종 시험에 단골로 등장하는 유물이다.김 관장은 “관람객들이 유물에 공감하고 감동을 받으려면 스토리텔링을 통해 현대와의 연결점을 알려줘야 한다”며 “역사에 생명을 불어넣는 전시를 선보이기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고 했다.
■ 약력
△1965년 경북 영천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 석사·박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1993~2012)
△국립춘천박물관장
△국민대 글로벌인문·지역대학 한국역사학과 교수
△국민대 명원박물관장
△2024년 국립중앙박물관장
성수영 기자 syoung@toplightsal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