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희미한 경계...경주에서 피어나는 사랑
입력
수정
[arte] 이태인의 mine de cinéma경주만큼 산 자와 망자 모두가 한데 섞여 흐르는 도시도 없을 것이다. 능을 보지 않고는 살기 힘든 곳. 능과 능을 뚫고 자란 고목은 둘 중 어느 쪽이 그 자리의 주인인지 모를 만큼 한데 뿌리를 내리고 있어 한 몸이나 마찬가지다. 그 곁을 재잘대는 유치원생 무리가 지나간다. 10대 커플 또한 죽은 자들이 누운 자리 옆에서 입을 맞춘다. 이처럼 장률의 영화 <경주>는 생과 사가 공존하는 장소인 경주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단 하루간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장률 감독의 영화 (2014)
신민아, 박해일 주연
'경주'는 무덤과 함께 현재의 삶이 진행되는 공간
기억과 후회가 만들어낸 환상이 현실을 뒤덮을 때...
소리 없는 정이 흐르는 도시 '경주'
<경주>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시작되지만 그 죽음은 일상과 맞물려 무심히 흐르는 죽음이다. 최현은 술이나 하자는 춘원의 청을 거절하고, 7년 전 셋이서 함께 갔던 경주로 향한다. 그를 움직인 건 당시 한 찻집에서 다 같이 들여다보았던 춘화를 다시 보고 싶다는 막연한 충동이다. 그러나 찻집의 주인은 바뀌어 있고 춘화는 벽지로 덮여 더 이상 볼 수 없는 상태다. 찻집 '아리솔'의 새로운 주인 윤희(신민아 扮)는 춘화에 대해 집요하게 캐묻는 최현을 경계한다. 윤희가 차를 준비하러 간 사이 최현은 춘화를 덮은 벽지를 들추어 그 너머를 들여다보려는 가망 없는 노력을 해본다. 시간으로 덮인, 혹은 시간에 의해 굳어버린 기억의 층위를 응시하려는 시도. 그 안의 것들은 흐르고 있을까? 아니면 그 시절 그대로 박제되어 있을까?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 현실과 비현실은 포개지되 하나로 전이되지 않고, 양자 간의 성립되지 않는 관계는 영화 특유의 정동이 작동하는 조건이 된다. 그중 ‘흐름’은 영화 속 인물들의 움직임과 일상을 채우는 주된 감각이다. 불륜에 대한 흐르는 소문, 유령처럼 흐르듯 움직이는 창희의 처, 부드럽게 땅을 구르며 흘러가는 자전거와 찻주전자에서 찻잔으로 흘러들어가는 찻물, 유영하는 금붕어 꼬리, 소변 소리, 빗소리, 수평 이동하는 영화카메라의 달리 샷(dolly shot). 흐름 앞에서 존재와 기억은 무력하기에 최현은 이따금씩 휴대폰 카메라를 들고 순간을 붙잡아 고정하려 들지만 그 시도를 모든 이가 달가워하는 것은 아니다.
최현의 대학 후배이자 과거 하룻밤 상대였던 여정(윤진서 扮)은 그가 찍은 자신의 얼굴 영상을 지우며 내뱉듯이 말한다. “모든 것은 다 지워야 돼.” 기억의 고정성에 대한 환멸을 드러내는 동시에 여정 자신이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최현 역시도 자신이 피사체로 고정될 때는 떨떠름한 반응을 보인다. 그는 영화 내내 관찰자이자 기록자로서 행동해왔지, 제 국적이나 정체성을 고정된 좌표에 둔 채 해석되거나 발화하기를 꺼려왔기 때문이다. 최현은 이방인이자 유랑자이기에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고 끼어들 특권을 가진 듯이 보인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착시일 뿐이다. 자신이 속한 차원에 갇혀 다른 영역에는 가 닿지 못하는 상태, 이는 존재로서의 인간 모두가 공유하는 한계다.
윤희는 남편과 닮은 최현의 귀를 만져보지만, 그 접촉은 “만져보니까, 전혀 다르네요.”라는 결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실패한 접속이다. 닮았다는 기억과 다르다는 체감의 괴리에서 윤희는 망자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을 감추지 못한다. 능 위에 누운 채 안에다 대고 “들어가도 돼요?”라고 외치는 윤희야말로 불가능한 입장의 권한을 요구하는 인물, 죽음이라는 차원에 진입하지 못하고 삶에도 온전히 붙박이지 못하는 경계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윤희는 경주라는 장소에서만이 가능한 불가촉의 사이공간을 고요히, 동시에 있는 힘껏 대변한다. 윤희를 짝사랑하는 영민(김태훈 扮)과 영민을 짝사랑하는 다연(신소율 扮) 또한 감정의 비대칭적 흐름에서 만날 수 없는 관계인 건 마찬가지다.
카메라가 천천히 달리 샷으로 움직여 창희의 아내를 프레임 밖으로 빼낸다. 달리 샷은 <경주>에서는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을 카메라워크로 표현하는 방식이면서, 흐름의 미학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기법이다. 카메라가 다시 한 번 최현을 원래의 프레임으로 복귀시키고 나면 생령은 사라져 있고 보이차를 가지고 온 윤희가 나타나 있다. 현실로의 복귀. 영화는 층위의 파열을 통해 인물 간 침투의 가능성을 잠시 열어두었다가 이내 다시 닫아버린다.
만날 수 없는 존재들끼리 닿아보려는 모든 시도는 완성되지 않거나 판타지에 그치고 만다. 흐름과 고정 사이의 불발과, 다른 층위끼리 오가며 접속할 수 있다는 낙관을 부인하는 물러남의 정서는 <경주>를 관통하는 관조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경주>는 접속이 실패한 자리에 남겨지는 잔여의 감각, 말하자면 층위 바깥의 진동이 일으키는 미세한 정동의 영화다. 서로 다른 존재의 결들이 나란히 흐르되 결코 하나로 섞이지는 않는 세계에서 인물들은 상대의 영역으로 건너갈 수 없다. 허나 그 실패에서야 비로소 감각되고 떠오르는 무언가는 분명 존재한다.
다시, 아리솔. 윤희는 춘화가 있던 자리를 응시하는 중이다. 윤희와 최현은 춘화 속에 함께 들어갈 수도, 춘화를 같이 들여다 볼 수도 없었지만 지금, 부재하는 그는 윤희가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기억의 지층에 퇴적된 존재가 되어 있다. 윤희는 아주 천천히, 아주 느리게 벽지로 손을 가져가 그 위를 가만가만 더듬는다. 다른 층위로 매장시켰던 것을 다시 지금 자신이 속한 층위로 불러내려는 시도다.
찌이익. 찢기는 소리가 암전을 가른다. 그 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것은 기억일까, 균열일까. 아니면 어떤 무엇의 열림일까.
이태인 영화 칼럼니스트
[영화 '경주' - 신민아, 박해일 숨겨진 주사 무삭제 영상] ▶바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