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는 증폭하는 맛이 위스키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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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코난의 맛있는 오디오증폭의 맛?
진공관을 술에 비유하다
소리와 술, 그리고 오디오
지금은 작고한 스테레오파일 평론가 아트 더들리의 글을 읽다가 퍼뜩 깨달았다. 그는 여러 진공관을 술과 비유했다. 예를 들어 300B는 압생트에 비유했고 같은 3극관 중 2A3는 코냑에 비유했다. 이 외에도 F2a는 데킬라, EL34는 보드카에 비유했다. EL34를 보드카에 비유한 이유는 보드카로 다양한 칵테일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EL34로는 무슨 음이든 다양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해석한 것. 반론의 여지는 분명히 있다. 어떤 지인은 EL34를 레드 와인에 비유했고 대신 KT88은 진로 오리지널이라 한다. 3극관으로 넘어가서 300B는 코냑, 2A3는 샴페인, 211은 삼양주라 한다.
뾰족한 필라멘트와 스페이서, 발갛게 달아오른 그리드, 스템과 유리관, 음악 신호를 전달하고 증폭하는 역할을 하는 진공관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독하게 아날로그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 집적회로가 발달하고 온갖 메카닉이 최첨단을 향해 빠르게 진화하는 과정에서도 그냥 그대로 거기 서 있었다. 따라서 진공관이라는 증폭 매체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듯했다. 첨단과학이라는 미명 아래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소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모든 것이 배신해 버렸다고 생각했을 때 아날로그는 부활했다.
그 이유에 대해 가장 명확한 증빙자료를 제출할 수 있는 예가 3극관이다. 직열 3극관 출력 구조를 가진 진공관 중에서 300B는 그 증거로 충분하고도 넘친다. 만일 그것이 냉장고나 최신 유행의 소비재라면 논거로서 충분치 않을뿐더러 시대착오적이라고 눈총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능과 편의성에 충실해야 살아남는 가전이 아니다. 음악을 재생하는 기기이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1930년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조금 이전에 미국의 최대 전자업체 웨스턴일렉트릭은 이후 1세기 증폭 관련 헤게모니를 지배할 소자를 만들어냈다. 그것이 300B, 애초엔 300A부터 시작되었다. WE의 91B 같은 진공관이 현재까지도 궁극의 진공관으로 추앙받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절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당시 최고 수준의 아날로그 기술을 절대 디지털 시대인 현재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LP 초반에서 발견하는 깜짝 놀랄 만큼 생생한 음질을 그리워하는 것과 동일하다.
누군가는 300B를 따뜻하고 영롱한 소리라고 했다. 하지만 나중에 처음 접한 300B, 그리고 845 같은 3극관은 절대 겨울날 손과 마음을 녹이는 듯한 감성적인 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3극관은 차가운 쪽에 더 가까웠다. 오디오 파일은 소리를 표현할 때 온도감, 색감 등으로 음색을 표현하며 때론 물리적인 특성은 강도와 밀도 같은 기표로 비유해 표현한다. 이때 3극관의 음색은 차갑다는 의미다. 서릿발 같은 차가움은 아니지만 늦가을 산에 올라가 목을 축이는 약수 한 사발 정도의 서늘함이 있다. 그리고 이런 청량감은 단순히 반듯하고 곧은 소리라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특유의 음색이 있어 여타 5극관에선 따라 하기 힘든 묘한 것이다.
MOSFET 그리고 히비키
진공관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이 3극관이라면 트랜지스터 중에선 MOSFET을 꼽고 싶다. 요즘엔 바이폴라가 많이 사용되지만 MOSFET은 여전히 많은 앰프에서 활약 중이다. 과거엔 더 심해서 우리가 익히 아는 크렐, 패스랩스의 섀시를 분해하면 좌우로 MOSFET 출력 트랜지스터가 수십 개씩 늘어서 있었다.
MOSFET를 사용한 앰프 중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앰프라면 뮤지컬 피델리티의 A1-X 같은 모델이다. 상판이 워낙 뜨거워 계란 후라이를 해 먹어도 된다는 농담을 하곤 했을 정도다. 더불어 패스랩스의 Aleph 파워앰프도 마찬가지다. 이 당시 앰프들은 섀시만큼이나 무척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운 소릿결을 지녔다. 여음이 길게 이어지고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잔향이 예뻤다. 따라서 바이올린, 피아노 같은 악기로 연주한 소편성 실내악에 제격이었다.
몇 년간 잊을 만하면 듣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히비키'라는 것이다. 히비키란 한자로는 響(울릴 향)이다. 내게 히비키는 일본 위스키의 고향인 야마자키 증류소에서 탄생한 위스키 중 하나로 가장 선명하게 기억된다. 맑은 물과 천혜의 자연환경에서 대대로 내려온 위스키 제조의 장인들이 만들어낸 일본의 위스키들. 이름만 들어도 그 빛깔과 향이 나를 덮쳐올 것만 같다. 야마자키, 하쿠슈 같은 싱글 몰트 위스키는 물론 히비키 같은 블렌디드 위스키는 이제 국내에서도 유명하다. 바로 역시, 히비키, 향이 등장한다.
오디오는 멀리서 보면 그저 가전제품 중 하나일 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만히 그 속내를 뜯어보면 그 안에도 작은 우주가 있다. 오디오를 이루는 소자 하나에도 역사가 있고 그 소자 하나의 차이로 인해 음질과 음향적 특성, 개성을 달리한다. 예를 들어 3극관은 웨스턴 일렉트릭으로부터 시작해 그 이후 300B는 송신관으로서 그리고 미 항공 우주국의 주요한 소자로 활약했다. 이후 여러 메이커가 홈 오디오에 300B를 부활시켰고 대중은 환호했다.
트랜지스터 소자가 개발되면서 트랜지스터 앰프가 유행하며 진공관 앰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우려를 뒤로 하고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MOSFET 트랜지스터는 열이 펄펄 끓는 클래스 A 증폭 앰프들에 종종 사용되면서 음악성 뛰어난 앰프의 트레이드마크로 활약해 왔다. 아무리 클래스 D, 디지털 앰프가 유행하는 요즘이라고 하더라도 일부 메이커는 이 소자를 활용해 더 없이 향이 깊은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코난 오디오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