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니커즈에 캐주얼한 팬츠, 티셔츠 위에 조끼를 걸친 그가 무대 위로 거의 뛰어들듯 등장하자 관객은 열띤 박수로 환영했다. 그는 수십 년간 할리우드에서 경력을 쌓아 온 감독이라기보다 영화 학교를 막 졸업하고 자신의 첫 영화를 선보이려는 열정으로 가득 찬 청년 감독처럼 보였다. 마라톤처럼 이어진 행사 일정에 지칠 법도 한데 그는 행사 내내 열정적으로 자기 자식 같은 영화에 관한 열변을 토했다. 때때로 그 열변은 수십 년간 공들인 자신의 영화가 극장에 걸리지 못하도록 했던 할리우드의 비즈니스 맨들을 향한 항변으로 변하기도 했다.
지난 8일 행사가 열린 씨네큐브의 객석은 젊은 관객으로 가득 차 있었고, 앞다투어 손을 들며 그에게 질문을 건네고 싶어 했다. 그는 바로 최근 극장가의 열풍을 이끌고 있는, 18년 만에 리마스터링으로 재개봉한 영화 <더 폴: 디렉터스 컷>의 감독 타셈 싱이었다.
지난 2월 8일 서울 종로구 씨네큐브에서 <더 폴: 디렉터스 컷> 감독 타셈 싱의 미니 GV가 열렸다. / 사진. ⓒ박정민영화의 시작은 마음속에 있었던 시각적 모티브
“보통은 스토리를 먼저 준비하고, 거기에 적합한 레퍼런스를 찾기 시작하죠. 하지만 저는 저만의 시각적 모티브들을 먼저 수집하고, 나중에 그것들이 연결되기 위한 스토리를 만들었습니다.”
뮤직비디오, 광고 감독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한 그는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등장 이전에도 특유의 미장센으로 유명했다. 영화 <더 셀/The Cell>(2000)에서는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과 오드 너드럼의 회화에서 영감을 받은 미장센을 선보였다. <더 폴: 디렉터스 컷>은 다르다. 타셈 감독은 이날, 이 영화 출발점이 자신이 오랜 기간 모아온 시각적 모티브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모티브가 구현될 수 있는 공간을 찾기 위해 17년이라는 시간을 쓴 것이다.
타셈 싱의 또 다른 영화 <더 셀>(2000) 스틸 컷. [위에서부터] 데미안 허스트의 '어떤 이들은 영원한 거짓말의 본질적인 수용으로부터 얻어진다'(1996)과 오드 너드럼의 회화 작품 '새벽'(1989)에서 영감을 받은 장면이다. / 사진출처. IMDb
그가 만약 이 공간들의 장엄함을 담아내려 한 것이라면 광각렌즈와 항공촬영 같은 역동적인 무빙이 두드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초망원렌즈를 활용해 공간의 깊이감을 압축했다.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인 인도 찬드 바오리의 수많은 계단에서 검은 병사들이 한 번에 쏟아져 나오는 장면이 광각으로 촬영되었다면 그저 공간의 특수성에 기댄 평범한 액션 장면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장면을 평면적으로 담아내었고, 수많은 계단이 만들어내는 음영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검은 병사들은 마치 하나의 화폭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려낸 장면들보다 외려 더 초현실적이다.
인도 찬드 바오리에서 찍은 이 장면. 평면적으로 담아내 초현실적인 느낌을 줬다. / 사진출처. ⓒ오드(AUD)영화를 만든다는 건 자신을 발견하고 이를 표현하는 문제
“요즘은 누구나 핸드폰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죠. 하지만 더 폴과 같은 작품을 만들기엔 오히려 더 어려울 것입니다.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발견하고, 또 이를 어떻게 표현하고 전하느냐의 것이거든요.” 7살 때 이 영화를 처음 보았다고 말한 관객이 지금은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을 꿈꾸고 있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 방법에 관해 질문하자 타셈 감독은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을 가장 먼저 하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과 오랜 기간 함께한 의상 디자이너 이시오카 에이코(2012년 작고)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내며 “그녀가 제시하는 이미지는 다른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곤충과 같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었습니다. 창조적인 생각을 해야 할 때 사람들은 아웃사이드 더 박스(Outside the box)라고 하는데 그녀는 애초에 그런 박스나 틀 같은 게 없는 사람이었죠.”라고 말하기도 했다.
영화 <더 폴: 디렉터스 컷>에는 조르조 데 키리코의 그림처럼 아치 구조와 주랑 현관이 주요한 공간적 모티브로서 등장한다. 그렇기에 여러 국가에서 촬영했음에도 하나의 지역에서 촬영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의 이미지에서 여러 초현실주의 회화의 영향이 보이기는 하나 그 어떤 영화와도 다른 비주얼을 만들어내고, 또 이렇게 18년 만의 재개봉 열풍을 이끌 수 있는 것은 그가 말한 것처럼 스스로 발견한 자신의 정체성과 그 안에서 솟아오른 형이상학적 모티브를 구현할 매개체(공간)를 세상 구석구석에서 찾아다닌 결과일 것이다.
사진. ⓒ박정민아이의 상상력은 비어있는 캔버스다
타셈 감독은 이날 알렉산드리아역의 배우를 찾기 위해서도 많은 시간을 소요한 것을 강조하면서 아이의 상상력, 그 천진난만함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여러 번 강조했다. 영화 초반 열쇠 구멍이 만들어 낸 옵스쿠라 이미지에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을 보여주던 소녀 알렉산드리아는 극의 후반부에 접어들며 이야기의 수용자에서 주동자로 뛰어든다. 또 그녀는 자신의 천진난만함으로 이야기의 결말마저 바꾸어버린다. 타셈 감독은 아이에게 처음에는 이 영화가 장애인에 대한 다큐멘터리라고 설명한 후 촬영했다고 밝혔다. 그렇게 해서 담긴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은 이 말도 안 될법했던 이야기를 말이 되게 만든다.
그는 행사가 끝날 때쯤 관객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 영화의 엔딩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결말은 관객이 느끼고, 또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부분임을 강조했다.
영화 <더 폴: 디렉터스 컷> 스틸 컷. 카틴카 언타루(알렉산드리아 역)의 생생한 연기를 위해 촬영 기간 내내 리 페이스(로이 역)는 다리를 못 쓰는 척 했다고 한다. / 사진출처. ⓒ오드(AUD)
행사가 끝난 상영관 밖의 홀에서도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이처럼 그의 영화가 18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이렇게 한국의 젊은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은 그가 스스로 발견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위해 모든 것을 내걸었던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열정이라기보다 광기에 가깝다. 배우 리 페이스가 한 인터뷰에서 그를 ‘미쳤다(insane)’라고 표현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가 영화에서 키 컬러로 활용한 선홍색처럼 그의 광기 어린 열정은 한국에서 다시 한번 불타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