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동호인 시절부터 알고 지내는 지인들이 꽤 있다. 음악과 오디오라면 죽고 못 사는 사람들이었는데 일부는 가족과 함께 상생의 미덕을 실현하느라 마치 스님이 된 듯 욕구불만을 참고 지내는 친구도 있다. 불철주야 바쁜 일터에서 땀 흘리며 음악이라곤 출퇴근 지하철에서 이어폰으로 잠시 듣는 게 전부인 사람도 있다. 일부는 아주 운이 좋은 경우여서 충분한 시간을 보장받아 음악을 즐기며 몇 년에 한 번은 크게 업그레이드를 감행하는 사람도 있다. 가족들에게 음악을 선물하면서 자신도 즐거이 음악을 즐기는 그들은 나름 부럽다.
흥미로운 건 음악의 끈을 놓고 있지 않은 사람들 특히 오디오는 음악의 도구로서 철저히 복무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진 사람들의 오디오관(?)이다. 이들은 오디오를 주체로 생각하고 음향을 즐기는 철저한 오디오파일(audiophile·오디오 애호가)과 조금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유행하는 알루미늄이나 카본 인클로저를 활용한 스피커를 추천해주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들어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역시 나무 인클로저가 아니면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제대로 내주지 못한다고 수줍게 고백한다.
오랜만에 연락이 온 선배도 비슷한 경우다. B&W(바우저 앤 윌킨스) 802D를 수년째 써오고 있는데 업그레이드하고 싶다고 자문을 구해왔다. 금액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고 나는 위화감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스피커로 추천했다. 동일한 브랜드의 신형인 802D4가 그것. 들어보고 그 선배가 한 말은 충격적이었다. “내가 좋아하던 소리가 아니네요”. 진동판 소재가 대거 업그레이드되었고 인클로저에 알루미늄이 추가되었으며 크로스오버 등 바뀐 것보다 바뀌지 않은 걸 찾기가 더 어려운 스피커에 이런 대답이 돌아올 줄이야.
실제로 음악을 즐기는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서 이런 현상을 흔하게 목도한다. 최신 소재로 각광받는 다이아몬드, 베릴륨 같은 진동판이나 카본 소재, 알루미늄이 적용된 스피커는 음향적으로 대단히 많은 발전을 거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또 이런 기술적인 발전 이전에 취향이라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최신 하이엔드 오디오 마니아만큼 빈티지 오디오 마니아도 많은 이유다. 그냥 단순히 나고 자란 시대적 배경만으론 설명이 되지 않는 풍경들이다.
B&W(바우저 앤 윌킨스) 802D.
하지만 음악과 연결된 맥락적 이해를 통해 이는 충분히 설명 가능한 현상들이다. 컨티늄이나 그래핀, 카본 같은 최신 소재보다 오히려 훨씬 이전 세대 B&W의 미드레인지로 상징되는 그 노란 케블라 진동판 소리를 좋아할 수도 있는 법이다. 다이아몬드, 베릴륨보다 직진성도 떨어지고 고역 한계도 떨어지면서 어느 순간 급격하게 롤오프 현상을 보이는 일부 소프트 돔의 위치가 여전히 건재한 이유다.
회고적인 디자인, 설계를 고집하고 있지만 여전히 음악 애호가의 가슴을 매만지며 장수하고 있는 영국 BBC 방계 브랜드는 그 증거다. 레이먼드 쿡이 설립한 케프는 여러 BBC 모니터 납품 제작자들에게 드라이버를 공급했다. 스펜더의 스펜서 휴즈 또한 자신의 브랜드를 통해 여전히 1970년대의 바통을 이어받고 있다. 더들리 하우드가 설립한 하베스는 이후 앨런 쇼가 이어받으며 BBC 모니터 스피커의 적통으로 사랑받고 있다.
BBC 그라함.
그라함이라는 브랜드도 눈여겨볼 만한다. 스펜더의 창립자 스펜서 휴즈의 아들 데릭 휴즈가 운영하는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사실 데릭 휴즈는 스펜더를 이어받았어야 맞지만, 그는 프리랜서 설계자로 오랜 시간 살다가 인생 후반기에 자신의 브랜드 그라함을 설립했다. 하베스, 스펜더의 설계 배후엔 데릭 휴즈가 있었고 현재 BBC 모니터엔 모두 그의 손길이 스며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튼 최근 하이엔드 스피커에 질렸거나 혹은 아무리 고급 소재와 첨단 공법을 활용해 만든 스피커라고 해도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면 이런 BBC의 후예들과 마주해볼 필요가 있다.
디자인은 박스 타입으로 회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그 옛날의 얇은 벽(thin wall) 이론을 고집스럽게 유지하고 내부에 흡음재를 채워넣은 방식은 사실 요즘의 하이엔드 스피커에 비하면 고루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음악은 단지 음향적 완벽주의와 대칭적이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이다. BBC 모니터 계열 스피커로 음악을 들으면 일단 소리는 전혀 자극적이지 않다. 부드럽게, 그리고 편안하게 음악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냥 소리가 음향적으로 훌륭하다는 생각을 넘어 정감이 넘치며 음악의 품 안에 자신을 맡기게 된다. 수천, 수억 원대 하이엔드 스피커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소리가 레트로 타입의 이 고색창연한 스피커에서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온다는 게 놀랍기도 하다.
BBC 그라함 LS 5/9.
우리를 둘러싼 공간이나 물건은 어쩌면 취향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되고, 그 취향 때문에 많은 고민과 번뇌를 스스로 일삼는다. 라이프, 리빙, 럭셔리 모두 어떻게 하면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전에 불과할 뿐이다. 리빙 스타일만 봐도 그렇다. 건축이라면 어떤 사람은 넓고 스트레이트한 미국식 집을 좋아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리 크지 않아도 오밀조밀하고 안온한 분위기를 좋아한다. 현실은 모두 비슷비슷한 아파트나 빌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지만 나는 반복보단 변주가 있는 곳, 순응하기보단 변화를 추구하는 공간이 더 좋다. 실제로 높은 천정고는 사람의 창의력을 촉진하고 낮은 곳에선 반복적이며 단순한 일에 적합하다는 학자의 주장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어느 쪽이 꼭 좋다는 보장은 없으며 각자의 생활 패턴과 취향에 부합하느냐가 관건이 될 뿐이다.
하이엔드 오디오 또한 운용하는 사용자 입장에서 볼 땐 취향의 총계다. 단, 가장 적극적으로 자신의 취향을 고집스럽게 투영한 경우에 한한다. 그저 돈으로 최상급 기기만 모아놓은 시스템은 한나절 구경하고 놀다 가면 그만인 놀이공원이 될 공산이 높다. 취향이 깊게 반영된 시스템은 특별한 취향과 오묘한 사운드, 무엇보다 한 개인이 평생 가슴 속에 퇴적한 취향의 격전지다. 나는 오늘도 윌슨오디오와 락포트, 매지코 같은 스피커에 감탄하다가도 집에 오면 BBC 모니터 스피커로 음향이 아닌 음악을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