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축복, 의도치 않은 행운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 세렌디피티(serendipity). 아마도 동명의 영화 덕분에 알게 된 이들이 많을 것이다. 미국 뉴욕 어퍼이스트 쪽에 실존하는 식당의 이름이기도 한 이 단어는 필자와도 깊은 사연이 있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9.11 테러 당시 뉴욕에서 유학 중이던 필자에게 같은 해 개봉한 이 영화가 적잖은 위로가 됐기 때문이다. 테러가 남긴 상처를 극복할 우연한 발견 같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기에 더욱 크게 감정이입이 되었으리라.
테러도 영화도 세렌디피티라는 단어의 기억도 이제는 25년이나 지나 가물가물해졌다가 최근 스리랑카를 다녀온 뒤 되살아났다. 스리랑카가 이 단어의 기원이란 사실을 의도치 않게 알게 되면서다. 스리랑카가 품은 뜻밖의 경의! 그 근사한 발견들을 소개해본다.
스리랑카에서 우연히 만난 경이로운 발견 5가지를 소개한다. 첫 번째는 바다거북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기 바다거북의 말캉거리는 앞 지느러미와 허우적대는 느낌이라고 말해야겠다. 세계적으로 멸종 위기인 바다거북을 함부로 만진다고?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절대로 불법한 행위가 아니다. 위기에 빠진 바다거북을 보호하고 치료하는 부화장(hatchery)을 방문하면 가능하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지구상의 바다에 존재하는 7종의 바다 거북들 중 무려 다섯 종류가 인도양에 면한 스리랑카의 남쪽 바다에 올라와 모래를 파고 알을 낳는다. 바다거북은 고기와 알, 그리고 껍데기까지 버릴 것이 없는 다양한 용도로 인류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 탓에 마구잡이로 남획되어 멸종위기 종으로 세계적인 보호를 받고 있다. 해파리를 잡아먹는 특성 때문에 종종 바다에 떠 다니는 비닐 봉투와 해양 플라스틱을 해파리로 오인하고 섭취하는데, 윗 속에 잔존하게 된 해양 플라스틱의 부력으로 바다에 가라앉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이로써 상어 같은 거대 포식 동물의 먹이가 되고 또 바다 표면에 표류하다가 모터보트나 선박의 프로펠러에 찢기는 등의 사고를 많이 당하기도 한다. 스리랑카의 남해안에는 여러 사설 단체들이 운영하는 다수의 부화장이 있다. 상처 입거나 다친 바다거북을 구조해 안전하게 치료해 바다로 되돌리고, 바닷가에 산란한 알을 수거해 안전하게 부화시켜 3개월 정도를 키운 다음 바다로 돌려보내는 역할을 한다. 막 모래사장을 헤집고 나오는 아기 거북이들은 바다에 도착하기도 전에 쉽게 포식자들에게 잡아 먹히기 때문이다. 말캉거리는 1개월된 바다거북을 만져보면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물에 대한 인류의 태도에 깊이 반성하게 된다.
가장 큰 감동을 안긴 거북은 3개월이 되어 바다로 나갈 준비를 하던 손바닥 보다 큰 어린이 거북이었다. 활기차게 헤엄치던 녀석을 물속에서 꺼내 잠시 만져보았는데 갈팡질팡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 모습이 초등학생인 딸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갈 곳을 잃은 바다거북의 부화와 보호 그리고 구조와 치료의 과정은 자라나는 어린 청소년들에게 인간의 이기심과 그를 극복하려는 의지에 대한 훌륭한 교육의 장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다거북 / 사진출처. pixabay
두번째 세렌디피티는 스리랑카가 자랑하는 건축가 제프리 바와(Geoffrey Bawa)다. 스리랑카에서 볼 것은 불교 유적, 차(tea), 바다가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이들이 트로피칼 모더니즘의 선구자인 바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스리랑카를 방문하고 있었다. 현지인 아버지와 네덜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바와는 뒤늦게 건축을 공부하면서 서른 여덟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건축가가 됐다. 자신의 고향 스리랑카의 전통 양식과 서구의 모더니즘을 결합해 매우 독특하고 분명한 미감을 가진 매력적인 건축물을 스리랑카는 물론 이웃 나라들에 많이 남겼다.
바와의 생가 3층에 위치한 게스트 하우스는 한 가족이나 커플이 머무를 수 있도록 준비돼 있었다. 대기자 명단이 일 년치나 밀려 있다니 바와에 무지했던 내 자신이 조금 창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콜롬보 도심의 연못 위에 지어진 시마말라카 사원도 도심 투어의 핵심 기착지이니 꼭 들러 바와가 추구한 스리랑카적 모더니즘을 확인해 보면 좋겠다. 스리랑카에는 바와가 조경가였던 그의 형과 합작한 프로젝트도 많이 남아 있다.
스리랑카하면 실론티, 실론티는 곧 스리랑카의 다른 이름이니 차를 빼고 스리랑카를 얘기할 순 없겠다. 하지만 스리랑카의 세번째 세렌디피티는 그냥 차가 아니라 밀크티라고 해야겠다. 누구나 매일 마시는 커피를 잘 소화시키지 못한다는 이유로 거의 마시지 않는데, 그 덕에 대화와 미팅을 위한 음료는 주로 차를 선택해왔다. 그러다 보니 시중의 카페에서 차이라떼나 잉글리쉬 블렉퍼스트라떼, 혹은 로얄밀크티 등의 메뉴를 종종 취하면서 다양한 밀크티에 대해선 좀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리랑카에서 이른바 궁극의 밀크티를 만나게 됐다. 그야말로 놀라운 발견이었다.
스리랑카의 최고급 홍차가 생산되는 1200m 고지의 누와라엘리야(Nuwara Eliya)에 위치한 실론티의 대표 브랜드 딜마(Dilmah)가 운영하는 티 트레일즈 롯지(Tea Trails Lodge)에 도착했다. 호텔 업계 용어로 풀 보드(full board), 즉 투숙 기간 동안 아침, 점심, 저녁 세 번의 식사와 음료를 모두 제공받는 최고급 호텔이다. 영국식 차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니 애프터눈 티도 그 서비스에 포함돼 있었는데, 고산 지역의 아름다운 호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고즈넉한 차 밭의 풍경를 바라보며 서늘한 기후의 방갈로에서 마신 밀크티는 그야말로 진정한 세렌디피티였다.
에프터눈 티 세팅 / 사진=필자 제공
커피처럼 짙은 차에 실온의 우유 그리고 약간의 정제하지 않은 설탕으로 만들어 내는 은은하고 밀도 높은 밀크티의 맛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사실 밀크티는 최상품의 차를 즐기는 방식은 아니다. 차문화를 완성한 영국에서도 모든 대중이 최고급 품질의 차를 맛 볼 수는 없으니 잘게 부순 찻잎으로 오래 우린 진한 차를 더 맛있게 소비하기 위해 택한 차선책이었다. 하지만 산지에서 티 백에 담지 않은 신선한 실론티에 우유를 섞어 마시는 밀크티는 견고한 균형감을 바탕으로 찻잎의 다양한 맛이 미묘하게 층위를 이루며 혀를 감동시켜 연거푸 차를 들이키게 했다.
다음 날 차 생산 공장에 들러 접한 인문학적 정보는 그 동안 잘 모르고 있던 차에 대한 오해와 무지를 깨우치게 했다. 직접 손으로 차 잎을 수거하는 실론티의 가치에 대한 이해는 물론 한 잔의 차가 우리 상에 오르는 일련의 과정을 알게 되어 티 메이커들에 대한 존경심마저 느끼게 됐다. 서울로 돌아온 후 차 밭 한가운데서 마시던 향긋하고 우아한 밀크티를 떠올리며 공장 한 켠의 매장에서 구매한 따끈따끈한 BOP(Broken Orage Peoke) 등급의 홍차로 밀크티를 만들었건만 스리랑카에서 마신 그 맛은 느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차를 따라주던 버틀러의 유난히 빛나던 미소 때문이 아닐까? 어쩜 궁극의 밀크티엔 반드시 실론인의 미소가 한 스푼 담겨야 하는 것은 아닌가 뒤늦은 또 하나의 세렌디피티를 보태본다.
밀크티를 제공하는 스리랑카 버틀러 / 사진=필자 제공
네번째 경이로운 발견은 스리랑카의 남동쪽 해변에 위치한 얄라에서였다. 얄라 국립공원(Yala National Park)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야생 동물 사파리의 중심 도시다. 이 곳의 사파리가 특별한 이유는 전세계 딱 두군데 밖에 없는 바다를 면한 야생보호동물 보호 구역이라는 사실! 이를테면 코끼리가 무리를 이뤄 모래로 덮인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아프리카 사파리처럼 사자와 얼룩말은 없지만 비교적 짧은 비행으로 자연 그대로의 야생동물을 만날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아시아에선 가장 인기를 끄는 자연 관광지다.
특히 스리랑카의 얄라 국립공원은 이 곳의 아름다운 표범으로 특히 유명하다. 물론 최상위 포식자이며 야행성 동물인 표범을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없지만 얄라에 위치한 와일드 코스트 텐디드 롯지(Wild Coast tented Lodge)에 묵으면 하루 두 번 제공되는 무료 사파리 투어를 통해 조우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수컷 공작의 암컷을 향한 구애의 춤도 자주 볼 수 있어 모두의 머리 속에 담긴 꽁지깃을 활짝 편 공작 본연의 자태를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이렇게나 정신을 혼미케 하는 공작의 자태는 현지인들에게도 오래 전부터 특별한 볼거리였을 것이다. 한두교에서는 공작의 꽁지 깃의 커다란 무늬를 인간에게 혜안과 통찰을 열어준다고 믿는 이마 한가운데 장식하는 제3의 눈에 비한다. 또 불교에선 공작명왕(孔雀明王), 힌두교에서는 주신 크리슈나나 전쟁의 신 인드라 같은 여러 신적 존대들의 상징물로도 일찌감치 높은 지위를 차지한 바 있다. 스리랑카 출입국사무소의 출국 도장에도, 스리랑카 항공의 유니폼에도 공작의 아름다운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 새는 스리랑카를 스쳐가는 모두에게 특별한 발견이었던 것 같다.
사실 그 이름도 낯선 것들이 많았는데, 본래부터 알던 계피나, 후추, 혹은 겨자 같은 것 외에도 정향, 소두구, 육두구, 팔각 같은 별난 모양의 향신료들을 정말 이렇게나 많이 집어 넣어도 자극적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듬뿍듬뿍 사용해서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남이 만들어준 음식만 먹다가 내가 직접 음식을 만들어 보니 사용하는 재료에 대해 더 관심이 가고 더 신중하게 요리에 임하면서 먹는 자세도 왠지 더 공손해진다.
향신료의 품질은 요리를 시작하자마자 드러난다. 코코넛오일을 두른 팬에 통후추 몇 알을 뿌리자 팝콘이 터지듯 반 건조 상태의 통후추가 터지면서 요리 교실이 진행되는 바닷가 숲 속 전체를 매력적인 풍미로 가득 채운다. 점차 낯선 향신료들이 투입되면서 놀라운 향기가 켜켜이 쌓이고 식욕을 돋우면서 놀라운 식탁이 완성됐다.
스리랑카의 중심도시 콜롬보에서 시작한 게 요리 식당인 미니스트리 오브 크랩(Ministry of Crab)에서는 머드 크랩을 가장 작은 0.5kg에서 괴물 같은 크기의 크렙질라(Crabzila)까지 크기 별로 주문이 가능하다. 현지의 향신료로 요리한 사람 얼굴만한 게 요리는 그 곳을 떠나온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자꾸만 떠오른다.
스리랑카는 우리에게 오랫동안 귀한 노동력을 공급해 온 나라다. 8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고향을 떠나와 외로움과 추위를 이기며 험하고 고된 일을 도맡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스리랑카인들이 꽤나 많기 때문에 심심치 않게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내심 험한 일을 시키고 괴롭히던 악덕 고용주들 때문에 우리에 대한 기억이 좋지만은 않겠다 생각했지만 대한민국을 고마운 나라로, 가족을 먹여 살릴 돈을 벌 기회의 땅으로 추억하며 하나같이 환한 미소로 필자와 일행을 반겨주었다.
정말로 스리랑카에서 경이로운 발견은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경이로운 5개의 발견 그리고 그 보다 더 값진 따뜻한 사람들의 나라 스리랑카에 꼭 한번 다녀오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