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가니니 콩쿠르와 시벨리우스 콩쿠르 우승을 거치며 부단한 발전을 거쳐 온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금호 아트홀에서 그의 연주를 처음 접할 당시 팽팽한 긴장감과 독특한 음색에 적지 않게 놀랐던 기억부터, 이후 점점 음악에 다양한 표현력과 깊어지는 집중력을 투영시켜나가는 모습을 통해 21세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그가 전국투어의 일환으로 지난 3월1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진행한 리사이틀에서 선보인 레퍼토리를 보노라니 이제는 연주뿐만이 아니라 프로그램 구성까지 얼마나 신중에 신중을 더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 프로그램은 슈베르트와 시벨리우스 두 작곡가의 소나티나와 무곡을 중점적으로 조명한 것으로서, 시대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그다지 연관성이 없는 이 두 작곡가의 자연에 대한 모방과 리듬에 대한 인식이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선험적인 인식을 통해 발견해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젊은 음악가로부터 어엿한 풍모를 내뿜는 예술가로 성장한 양인모만의 독창적인 시선이자 예술적 통찰력이 아닐까 싶다.
양인모 리사이틀 공연 / 사진. ⓒ Soongan
과다니니 바이올린과 더욱 한 몸이 되어가는 듯, 그의 소리 하나하나 겉돌거나 흔들리는 법 없이 이것이 “양인모의 소리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개성적이고 전체의 스케일과 악기의 공명 또한 의도에 부합하여 적절하게 변화한다. 무엇보다도 약음부터 강음까지 맑고 청명한 톤을 견지하는 동시에 날렵한 중음과 적절하게 솟구치는 고음을 만들어내는 모습이야말로 양인모만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질을 바탕으로 그가 이 두 작곡가를 대하는 모습을 보노라니 음악적 세밀화가라는 표현을 주저 없이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늘고 작지만 또렷하거나 크고 강하지만 일정한 비브라토, 정확한 운지와 흔들리지 않는 보잉을 바탕으로 마이크로한 디테일은 더 정밀하게, 매크로한 볼륨감은 더 굳건하게 만드는 바탕을 배경으로 작곡가들이 갖고 있던 마음의 풍경을 너무나 정묘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이는 곧 18세기 베네치아 풍경 화가들의 그림을 연상케했다. 그 가운데 색조나 구도가 인위적이 느낌이 드는 미켈레 마리에스키나, 인상주의적이고 속도감이 있는 프란체스코 과르디보다는, 청명한 햇빛이 쏟아져 지나가는 사람들 의상의 발색까지도 선명하게 관찰할 수 있는 카날레토(Canaletto, 1697~1768)의 풍경화가 보다 양인모의 음악과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양인모 리사이틀 공연 / 사진. ⓒ Soongan
첫 곡부터 마지막까지 슈베르트와 시벨리우스의 심상이 투영해낸 다른 모습들을 자신만의 속도감 있는 붓질을 통해 능숙하게 하나의 결로 그려낸 양인모는 첫 곡 슈베르트의 소나티나 D.384부터 농도 짙은 설득력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악장으로 활동하는 김수연의 연주회에서 느꼈던 강한 스트로크와 종을 울리는 듯한 음향, 발산하는 음색의 플로레스탄적인 슈베르트와는 전혀 다르게, 양인모의 슈베르트는 보다 절제된 톤과 촘촘한 음색의 그라데이션, 그러나 선명한 색감의 대조와 음영의 대비가 여운을 주는 오이제비우스적인 슈베르트라고 표현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2악장에서 피아노와 함께 아름다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는데, 사실상 피아니스트 조나단 웨어의 연주 또한 대단히 놀라웠다. 앙상블 전문가로 활동하는 그는 톤과 앙상블, 음향 컨트롤을 섬세하면서도 직관적으로 구사하여 섬세한 양인모의 톤과 호흡에 손에 장갑만큼이나 훌륭한 파트너쉽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슈베르트의 론도 브릴란테 D.895에서 보여준 그 아름다운 음향과 건강한 활력이 건네준 감동만큼이나 이 두 음악가의 앙상블이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바라지 마지않는다.
양인모 리사이틀 공연 / 사진. ⓒ Soongan
시벨리우스를 대하는 양인모의 모습으로부터 도광양회(韜光養晦, 자신의 재능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면서 기다린다)란 고사성어가 단박에 머릿속에 떠올랐다. 북유럽의 자연과 삶을 보여주는 듯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작은 작품들에 이토록 강렬한 인상을 주는 대곡의 의미를 심어줄 때까지 얼마나 자신을 단련했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기 때문이다.
바이올린 협주곡만이 시벨리우스가 아니라는 듯, 양인모는 음악을 대하는 작곡가의 진솔한 목소리에 접근해 들어가 그만의 마음을 대변하는 보편적인 색감과 정서를 이들 소품을 통해 오롯이 발견해냈다. 더군다나 이 어려운 과정을 숨기고 너무나 자연스럽고 천연덕스럽게 표현해내는 스프레짜투라(sprezzatura) 같은 그의 솜씨에 더욱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우리는 시벨리우스 음악의 본연의 개성, 낯설지만 이끌리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양인모를 통해 처음으로 깨닫게 된 것 같다.
양인모 리사이틀 공연 / 사진. ⓒ Soongan
이렇게 프로그램을 정성스럽게 구상하여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해낸 양인모의 번뜩이는 감수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부 마지막 곡으로 리스트가 슈베르트를 인용한 빈의 '야회' 가운데 '발스 카프리스(오이스트라흐 편곡)'를 연주하여 자신만의 숙련된 톤과 반작이는 음색으로 음악을 가볍지만 아름답게 전반부를 마무리한 것처럼, 2부가 끝난 뒤 세 곡의 앙코르를 통해 연주회 전체를 매력적으로 종결지었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와 시벨리우스의 '마주르카', 드뷔시의 '아마빛 머리의 소녀'를 연주했는데, 흥분적인 테크닉을 앞세운 작품들이 아니라 연주자 자신의 음색과 스타일을 강조하는 동시에 앞선 프로그램과 결을 함께 할 수 있는 작품들이라 더욱 짙은 여운을 남길 수 있었다. 불필요한 언급일 수도 있겠지만, 시인 이상, 혹은 바이올리니스트 로자코비치를 연상케 하는 부푼 헤어 스타일과 한결 절제된 하체 움직임은 이전과는 다른 성숙한 느낌이 물씬 풍긴 탓에 음악 외적인 매력 또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