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생활건강 등 국내외 100여 개 화장품 업체에 유리 용기를 공급해온 강소기업 영일유리공업이 이달 초 사모펀드에 경영권을 넘겼다. 고영일 창업주가 2021년 별세한 뒤 유족이 100억원대 상속세를 마련하지 못해서다. 코스닥시장 상장사인 새빗켐과 에스에이티이엔지도 지난달 같은 이유로 가업 승계를 포기했다.
자녀 6명 두고도…샤넬도 뚫은 회사, 3000억 받고 넘긴 이유
중소·중견기업이 상속세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잇달아 경영권을 매각하고 있다. 정부가 2008년 이후 6회에 걸쳐 가업 승계 시 상속세 공제 한도를 늘렸지만 까다로운 요건 때문에 수혜 기업이 많지 않다. 주력 업종인 방제서비스업이 공제 대상에서 제외돼 가업 승계를 포기한 중견기업 A사가 대표적 예다.

세계 최고 수준인 60% 상속세율(최대주주 할증 포함)도 가업 승계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2023년과 2021년 각각 사모펀드에 매각된 삼화와 동진섬유는 수백억원대 상속세 부담으로 회사 경영을 포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가운데 정부와 여야가 논의 중인 상속세 개편안에 가업 승계 지원이 빠질 가능성이 높아 상속세 부담이 큰 중견기업을 중심으로 경영권을 파는 사례가 급증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백장미 한국중견기업연합회 경제정책팀장은 “과도한 상속세 부담이 중소·중견기업들의 기업가정신을 꺾고 있어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샤넬도 뚫은 알짜 중기, 상속세 무서워 家業 포기했다
富대물림 덧씌워 최고세율 50%…OECD 2위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50%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가운데 일본(55%) 다음으로 세율이 높다. 매출 5000억원이 넘는 기업의 최대주주가 상속하면 기존 세율에 20% 할증이 붙어 상속세율이 세계 최고 수준인 60%로 올라간다. 한국에만 있는 최대주주 할증 상속세를 내기 위해 회사 지분을 매각하면 경영권을 위협받는다. 이럴 바에 25% 세율의 양도소득세만 내고 사업을 정리하는 게 낫다는 인식이 기업인 사이에 팽배한 이유다.

◇상속세 부담에 매각 줄이어

18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최근 들어 중소·중견기업이 상속세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잇달아 경영권을 매각하고 있다. 2023년 미국계 사모펀드 TPG에 3000억원을 받고 경영권을 넘긴 플라스틱 용기 전문업체 삼화가 대표적인 예다. 이 회사는 상속세를 비롯한 여러 이유로 매각을 택했지만 막판까지 가업 승계를 고민한 것으로 전해졌다. 어디에 내놔도 손색 없을 정도로 상품 경쟁력을 인정받은 알짜 회사이기 때문이다.

1977년 조성환 대표가 설립한 삼화는 입생로랑 샤넬 디올 등 해외 명품 브랜드에 납품했다. 비상장사로 2023년 매출 1513억원에 140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다. 오래전부터 2세 경영을 준비했지만 자녀가 6명인 상황에서 상속세 재원을 무리하게 마련하기보다 지분을 미리 정리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월 사모펀드(PEF) 운용사 LX인베스트먼트에 매각된 폐배터리 재활용업체 새빗켐은 갑자기 늘어난 증여세 탓에 어쩔 수 없이 경영권을 넘긴 사례다. 새빗켐은 2020년 박민규 창업주가 아들 박용진 이사에게 지분을 증여하며 가업을 승계하려 했다. 기업 규모를 키우기 위해 추진한 상장이 독으로 작용했다. 2022년 코스닥시장 상장 때 적용된 기업 가치가 증여 당시 가치보다 훨씬 높게 평가받아 증여세 부담액이 수백억원으로 늘어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배터리산업이 침체기에 접어들며 2023년 적자로 전환하자 매각을 택했다.

디스플레이 장비를 제조하는 상장사 에스에이티이엔지도 비슷한 이유로 20여 년간 이어온 가업을 정리했다. 이 회사는 갑작스러운 창업주 별세로 상속세 수십억원을 마련하지 못해 지난달 경영권을 부동산개발업체 글로벌씨앤디에 팔았다.

◇주식으로 상속세 낸 기업 중 40% 망해

어떻게든 상속세를 내가며 가업을 이어가려 한 기업은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다. 박수영 국민의힘 국회의원이 기획재정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1997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상속세를 주식으로 대신 낸 기업 311곳 중 휴·폐업한 회사가 126곳(40.5%)에 달했다. 주식 물납 형태로 상속세를 납부한 기업 10곳 중 4곳이 수년 안에 문을 닫았다는 얘기다. 주식 물납으로 지분율이 급락한 상속인은 대부분 경영권 위협에 시달리거나 경영 의지가 꺾인다.

중소·중견기업은 과중한 상속·증여세 부담을 줄이지 않으면 더 많은 기업이 매각의 길을 택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정부와 여당인 국민의힘은 지난해 이런 의견을 수렴해 상속세 최고세율을 50%에서 40%로 낮추고, 최대주주 할증을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거대 야당 더불어민주당의 반대로 무산됐다. 600억원인 가업상속공제 한도를 1200억원으로 늘리는 안 역시 부자 감세라는 비판을 받아 추진 동력을 잃었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의 상속세는 가업 승계 의지를 꺾는 구조를 고착화한다”며 “가족만큼 해당 기업에 애정이 있는 경영자는 없는 만큼 특수관계인의 도덕적 해이는 막으면서 더 성장하려는 기업을 막지 않는 형태로 상속세제를 개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황정환/차준호/박종관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