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 빅스비, 인공지능(AI)은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까?"

영상 속 인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스마트폰의 AI 음성비서를 부른다. AI와 빅데이터가 개인정보와 국가 안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묻는다. 삼성 갤럭시의 '빅스비', 애플의 '시리' 등 프로그램이 저마다 학습한 내용을 읊는다.
양아치, '고스트 1.0.0' 설치 전경.(2025)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양아치, '고스트 1.0.0' 설치 전경.(2025)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대화 내용보다 섬뜩한 것은 질문자의 정체다. 질문을 던지는 사람 '샐리'도 생성형 AI로 제작된 가상 인물이다. 여성의 얼굴 형태를 취하면서도 덥수룩한 콧수염이 난 모습은 이미지 생성 과정에 어떤 오류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AI가 AI를 부리는 미래를 묘사한 설치미술가 양아치의 신작 '고스트 1.0.0'이다.

서울 신사동 코리아나미술관의 국제기획전 '합성열병'은 급속도로 발전한 생성형 AI를 동시대 작가 9명의 시선에서 돌아본다. 독일 출생의 말레이시아계 작가 로렌스 렉, 싱가포르 설치미술가 호 루이 안 등 국내외 작가의 작품 30여점이 걸렸다. 미술 분야에서 AI 기술의 현주소는 어디인지, 데이터가 권력이 되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지 등을 질문한다.
서울 신사동 코리아마미술관에서 열린 국제기획전 '합성열병' 전시 전경.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서울 신사동 코리아마미술관에서 열린 국제기획전 '합성열병' 전시 전경.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아직은 숱한 오류를 낳는 AI 이미지를 다루면서 전시는 시작한다. 스웨덴 작가 요나스 룬드는 생성형 AI로 제작한 영상작업을 선보였다. 기계에 밀려 직장을 잃는 등 일곱명의 소외된 인물들이 단체로 상담하는 줄거리다. AI가 그려낸 등장인물들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일그러진 형태다. 이들의 불안한 처지를 상징하는 듯하다.

전시 제목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책 <아카이브 열병>(1995)에서 따왔다. 데리다는 역사의 기록인 '아카이브'에 투영된 권력과 욕망을 포착한 뒤 이를 '열병'이라고 진단했다. 이번 전시는 '합성 미디어'를 둘러싼 열병을 조명한다. 합성 미디어는 AI나 딥러닝 기술로 만들어진 이미지나 비디오, 오디오 등 디지털 콘텐츠다.
프리야기타 디아, '열대 터빈'(2023)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프리야기타 디아, '열대 터빈'(2023)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권력을 향한 열병은 사실 새로운 일이 아니다. 과거엔 강력한 군대나 종교적 권위, 자본력 등이 힘의 지표였다. 미래엔 그 자리를 데이터가 차지할 뿐. 싱가포르 작가 프리야기타 디아의 영상작업 '열대 터빈'은 디지털시대의 '데이터 추출주의'를 동남아 식민지 역사에 비유한다. 열강들이 식민지에서 고무를 뽑아낸 것처럼 오늘날 거대 기업들이 개인정보를 취한다는 지적이다.

전시된 작품들엔 신기술에 대한 기대감과 불안감이 뒤섞였다. 이번에 국내에 처음 공개된 로렌스 렉의 '아이돌(AIDOL)'은 한물간 슈퍼스타가 AI 작곡가의 도움으로 재기를 노리는 과정을 담은 영상 작업이다. 인간과 AI의 협업을 마냥 낙관하진 않는다. 83분간 이어지는 영상이 진행할수록 사소한 영역까지 감시하고 통제하는 거대한 실체가 드러난다.
방소윤, '탈피하는 수은'(2025).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방소윤, '탈피하는 수은'(2025).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는 세계 주요 미술관들이 AI 미술 전시를 연달아 기획하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에서 지난달 개막한 '머신 러브: 비디오 게임, AI, 그리고 현대미술'이 단적인 예다. 프랑스 주드폼 국립미술관에서도 4월 'AI에 따른 세계' 기획전을 연다. 국내 최초 공개되는 해외 작품과 국내 작가들의 신작을 한자리에 만날 기회다.

전시는 6월 28일까지, 성인 6000원.

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