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역사에서 최고의 악역 캐릭터는 누구일까. 후보를 다섯 정도 압축하면 빠지지 않을 인물이 있다. 스카르피아(Scarpia). 이름부터 잔인하고 사악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루제로 라이몬디가 스카르피아 역으로 분한 토스카 앨범(1992) / 사진출처. Presto Music 사이트
그는 귀족으로 남작(男爵) 직위를 갖고 있으며 로마 경시청 우두머리다. 나폴레옹 혁명의 불길이 이탈리아에 번지지 못하도록 하는 게 책무다. 공화파 정치범 안젤로티를 쫓다가 성당에 잠입해 수상한 낌새를 감지한다. 성당 그림을 그리는 화가 카바라도시가 안젤로티를 도와준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가 보이지 않자, 대신 나타난 그의 애인 토스카에게 아타반티 부인이 놓고 간 부채를 내보이며 그녀의 질투심을 자극하고, 동시에 토스카에게 흑심(黑心)이 발동한다. 한편 추기경은 경찰과 사람들이 성당에 밀려오는 상황을 왕당파의 승리로 오인하고는 테 데움(Te Deum, 주를 향한 감사의 찬미가) 의식을 올린다. 스카르피아는 좇는 자를 잡고, 토스카도 손에 넣게끔 해달라고 신께 기도한다.
토스카가 스카르피아에게 애인 카바라도시의 구명을 요구하는 장면 / 사진. Christian Michelides, 출처. 독일 위키피디아
가톨릭 미사의 경건한 합창, 악인을 축복하는 어리석은 신부, 심적 혼란에 빠진 순진한 여인. 무섭고 희한하고 안타까운 장면이 다중으로 겹쳐지는 이 지점에서 스카르피아의 독백이 담긴 아리아가 나오는데 바로 ‘테 데움’이다.
“지금은 가거라, 토스카여! 그러나 너는 이제 스카르피아의 것이로다. 차오를 질투심을 네 가슴 속에 심어 놓았다. 어쩌면 그렇게도 빨리 의심이 부풀어 오르는지. 너의 그 의혹은 내가 바라는바. 나에겐 두 가지 목표가 있다. 하나는 반역자의 목을 베는 것. 다른 하나는 내게 사랑을 고백하는 너의 눈동자다. 그놈은 교수형에 처할 운명이고, 너는 내 품으로 오려무나.”
1막의 마지막 장면인 테 데움(Te Deum) 장면. 스카르피아가 왼쪽에 서 있다. 1914년 이전 뉴욕 구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공연 / 사진. ⓒBoyer, 출처. 위키피디아
1900년 1월 14일 로마에서 초연한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 1800년 1월 17일부터 이튿날까지의 이야기로 사랑⸱욕망⸱의리⸱운명⸱의심⸱질투⸱음모⸱희생 등이 탄탄히 엮여 조화를 이룬 드라마다운 드라마다. 아리아 ‘오묘한 조화(카바라도시)’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토스카)’ ‘별은 빛나건만(카바라도시)’도 좋지만, 1막 말미를 장식하는 대서사시, 테 데움의 장면이야말로 놓칠 수 없는 큰 볼거리다. 희대의 악당 스카르피아가 주도하는 장엄한 아이러니!
모름지기 진짜 악인은 대개 멀쩡한 미남이다. 뚱뚱하거나 볼품없지 않다. 악의 우두머리는 준수한 용모라야 극적인 효과가 배가되는 법. 숱하게 명멸한 범죄⸱스릴러 영화들을 보라.
역대 최고의 스카르피아는 누굴까. 루제로 라이몬디(Ruggero Raimondi,1941~,伊)야말로 제일 앞줄일 터. 무엇보다 차갑게 잘생긴 게 큰 이유다. 앞머리에 밝혔듯 스카르피아는 인물이 준수한 귀족이자 품위 있고 성실한 신앙인인 동시에 나라와 체제를 지키는 치안공무원이다. 기품있는 외모의 라이몬디가 1992년 51세 때 지금도 회자되는 오페라 영화에 등장한 이유다.
[1992년 영화판 토스카 중에서 라이몬디의 ‘테 데움’]
[70대에 ‘테 데움’을 부르는 루제로 라이몬디]
그는 에치오 핀차와 체사레 시에피를 잇는 이탈리아 정통 바리톤의 직계다. 볼로냐 출신으로 로마의 명문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을 졸업했다. 커리어의 30년 이상을 돈 조반니, 에스카미요(카르멘), 보리스 고두노프 역의 아이콘으로 군림했고, 모두 영화로 만들어졌다. 특히 그가 스카르피아로 나온 ‘토스카’는 107개국에 생중계되었으며 에미상 3개 부문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오페라에서 스카르피아는 토스카의 칼에, 카바라도시는 스카르피아 부하들의 총에 죽고, 토스카는 안젤로 성 아래로 몸을 던진다. ‘O Scarpia, avanti a Dio(오, 스카르피아. 신 앞에서 보자꾸나)’ 토스카의 절규에 찬 마지막 말이다. 둘은 과연 하늘에서 서늘하게 재회했을까.
토스카가 경건하게 스카르피아의 시신 위에 십자가를 놓는다. 1914년 이전 뉴욕 구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공연. / 사진. ⓒBoyer, 출처. 위키피디아
강성곤 음악 칼럼니스트⸱전 KBS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