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복합문화공간 피크닉(Piknic)서
패티 스미스와 사운드워크컬렉티브의 협업 전시
'끝나지 않을 대화:Correspondences'
기후 변화, 동식물의 멸종, 대형 산불 등 위기 조망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파올로 파솔리니 등
역사적 인물을 영상과 사운드, 시와 이미지로 재조명
"파리-뉴욕행 비행기 옆자리서 우연히 만나 시작"
소리는 세계의 기억을 담아내는 그릇
아마존 숲의 사각거림, 체르노빌 땅을 흔드는 작은 진동, 파주 비무장지대(DMZ)를 지나는 바람….
남자는 언제나 이런 장소로 훌쩍 떠난다. 그곳에서 '소리'를 채집한다. 예측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시간의 흔적과 세계의 기억을 담아 뉴욕으로 돌아온다. 여자는 남자가 녹음해온 시간의 흔적을 함께 듣는다. 마음으로 떠나는 두 번째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쓴다. 시가 되기도, 소설이 되기도, 짧은 문장이 되기도 한다. 때론 노래로, 때론 그림으로 살아난다.
<사운드워크 컬렉티브x패티 스미스: 끝나지 않을 대화>
이것은 미국 출신 '펑크록의 대모'로 불리는 패티 스미스(79)와 음향예술가 스테판 크라스닌스키(56)이 지난 10년 넘게 함께 해온 작업의 방식이다. 크라스닌스키는 뉴욕과 베를린을 기반으로 전자음악, 필드 레코딩, 환경음을 결합해 독창적인 음악적 풍경을 만드는 2인조 그룹 '사운드워크 컬렉티브Soundwalk Collective'의 창립 멤버. 이들의 작업은 소리와 시가 주고 받는 대화로 요약된다. 역사의 비극과 치유, 인간성의 회복을 함께 외쳐왔다.
<끝나지 않을 대화> 전시장에서 패티 스미스(왼쪽)와 스테판 크라스닌스키. 피크닉 제공
<사운드워크 컬렉티브x패티 스미스: 끝나지 않을 대화>에서 패티 스미스와 스테판 크라스닌스. 10여년 전 비행기 옆좌석에서 우연히 만나 공동작업을 하게 됐다. 피크닉 제공
두 사람은 10년간 함께한 작업과 한국 땅에서 영감을 받은 신작 등 8점의 영상과 드로잉, 설치 작품이 처음으로 서울을 찾았다. 지난 19일 서울 남창동 복합문화공간 피크닉에서 개막한 전시 ‘끝나지 않을 대화(Correspondences)’에서 패티 스미스와 스테판 크라스닌스키를 만났다.
“스테판의 소리는 기억이고, 나의 시는 응답입니다. 스테판이 육체적 여행자라면, 나는 정신의 여행자입니다. 80세가 가까워진 나이라 더 이상 마음껏 여행하지 못하지만, 그를 통해 나의 마음은 원없이 떠나고 또 돌아왔어요. 이 전시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대화의 일부이죠.” -패티 스미스
남산 자락에 있는 4개층의 전시 공간은 옥상까지 차곡차곡 이들의 작품으로 쌓였다. 크리닌스키가 역사적인 장소들을 찾아가 수집한 소리에 스미스의 시 읽는 목소리가 겹친다. 고대 신화 속 메데이아의 서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메데이아', 체르노빌 원전 사고 후를 기록한 '체르노빌의 아이들', 1946년부터 현재까지 대형 산불과 생태계의 파괴를 다룬 '산불'등이 이어진다. 8편의 영상 작품은 각각 독립적인 서사를 갖고 있지만, 스크린끼리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
<사운드워크 컬렉티브x패티 스미스: 끝나지 않을 대화>의 '메데이아' 전시 전경.
<사운드워크 컬렉티브x패티 스미스: 끝나지 않을 대화> 전시 전경.
이 전시를 단순히 교훈적이라거나 사회고발성 의도를 갖고 있다고 치부하긴 어렵다. 예를 들어 '수도자와 예술가와 자연'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인용해 예술가의 소명과 자연의 관계를 사유한다. '메데이아'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메데이아의 이야기를 시적 언어로 풀어내는데, 여기엔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감독의 영화 '메데이아'가 차용됐다. 세기의 오페라 가수 마리아 칼라스의 영화 속 장면이 겹친다.
<끝나지 않을 대화>에서 1946년 이후 발생한 전 세계 대형 산불의 발생 장소와 날짜, 피해 규모를 기록한 작품 중 일부. 김보라 기자
3층의 마지막 전시장의 '산불'과 '대멸종'은 사람들의 발길을 가장 오래 머무르게 한다. 두 사람이 각자의 시와 소리를 결합해 1946년부터 2024년까지 발생한 산불의 발생지역과 시기, 이 세상에서 사라진 생물종의 이름을 꺼내온다. 크라스닌스는 “1946년은 스미스가 태어난 해로, 그 동안 매년 국제기구와 기후 관련 기관의 협조로 자료를 수집해왔다”고 했다.
"창백한해변쥐, 분홍머리오리, 아시아치타, 비에스카진흙거북, 검은마모새, 가시난쟁이사마귀…." 낯선 생물종의 이름이 스미스의 목소리를 통해 불려질 때마다 알 수 없는 숙연함이 몰려온다. 스미스는 이렇게 썼다.
‘내 일생 동안 많은 종을 잃었다. 다시는 만질 수 없다. 다시는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다. 우렁찬 야생의 발구름을.’
<끝나지 않을 대화>의 아시아 투어 개막일인 지난 19일 남산 피크닉에서의 패티 스미스(왼쪽)과 스테판 크라스닌스. 배경엔 DMZ 인근에서 자생하는 식물로 꾸민 테라리움이 설치됐다.
둘의 협업은 아주 우연히 시작됐다. 10여년 전 각각 모로코, 마케도니아 여정을 마치고 파리에서 환승해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가 옆자리에 앉은 게 인연이 됐다. 크라스닌스키는 당시 독일 출신 싱어송라이터이자 배우, 앤디 워홀의 뮤즈였던 '니코(크리스타 페프겐·1938-1988)'의 유작 시집을 읽고 있었다. 마침 니코의 가까운 친구였던 스미스가 이를 알아보고 기내에서 서로의 작업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눴다고. 뉴욕에 돌아온 바로 다음날 스미스는 크리스닌스의 스튜디오 문을 두드렸다. 니코의 마지막 순간을 담은 사운드 작업 '킬러 로드Killer Road(2016)' 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스미스는 그날을 회고하며 말했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공기가 우릴 이어준 것 같아요. 하늘에서 처음 만났으니까. 그가 필드 레코딩을 해온 것을 스튜디오에서 함께 들으면, 그리고 싶은 이미지나 쓰고 싶은 문장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추상적인 표현일 수 있지만, 분명히 공간을 만들어내고, 그 안을 걸어다닐 수 있는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죠. 로큰롤이나 헤비메탈 사운드, 기타 선율 위에서 즉흥적으로 노래해 왔지만, 신성한 장소로부터 온 음향들은 전혀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전시에 아날로그적 감성과 여백을 더하는 건 스미스의 드로잉과 직접 쓴 손글씨 작품들이다. 일부는 전시 개막 전날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밤새 완성했다. 고대 영문 서체같기도, 아랍어 필체같기도 하다. “제가 어릴 때는 잉크를 펜촉에 찍는 방식으로 글씨를 썼지요. 그때 18세기 캘리그라피에 빠졌어요. 토마스 제퍼슨의 글씨체도 멋졌고요. 뜻은 몰라도 그 문양이 좋아 아랍어 사전도 갖고 있답니다. 옛 영문 서체와 아랍어의 흘림이 멋져요.”
패티 스미스의 필체. 영문은 18세기 캘리그라피에서 영감을 받았고, 한글은 전시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연습해 썼다. 김보라
언어에 대한 스미스의 호기심과 애정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요즘은 넷플릭스로 보는 한국 드라마와 영화에 빠져있다고. 최근 ‘미스터션샤인’을 보며 한국어의 음성, 글자가 가진 독보적인 매력에 스며들었다.
“한중일을 비슷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언어를 보세요. 한글은 그 중에서도 전혀 다른 소리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어요. 한글의 형태도 그렇고요. 언어 중에 소리로만 보면, 한국어와 러시아어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가합니다.”
한국 전시를 위해 전시장에는 DMZ의 토양과 생태를 조사하고 이를 토대로 DMZ 인근에서 자생하고 있는 버섯과 식물들을 채집해 소규모로 재현한 테라리움이 설치됐다. 패티 스미스는 관람객들이 가져갈 수 있는 종이를 구비해두고, 거기에 직접 한글로 또박또박 썼다. '자연에는 경계가 없다.'
끝나지 않을 대화 전시 전경
스미스는 1975년 1집 '호시스(Horses)'로 데뷔, 수많은 히트곡을 내고 <롤링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100인-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오른 '펑크록의 여왕'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모든 예술 여정의 시작은 문학에 있었다. 랭보의 시에 반해 시인으로 시작했고, 화가가 되고 싶던 시기도 있었다고. 그가 쓴 가사들은 70년대 '로큰롤과 시를 결합한 새로운 스타일'이라 불리며 수 많은 기록을 세웠다.
한때 연인이자 예술적 동반자였던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와의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 <저스트 키즈>는 2010년 미국 최고 문학상인 전미문학상을 받았다. 1972년 첫 시집 <일곱번째 천국 Seventh Heaven)>과 <저스트 키즈>를 비롯해 <몰입>, <M트레인>, <달에서의 하룻밤> 등 여러 권이 번역돼 출간됐다. 그는 "시를 쓰다 로큰롤에 우연히 빠지게 됐는데, 밴드 활동은 협업이 기반이어서 다른 예술 장르나 예술가와 함께 일하는 것을 평생 해왔다"고 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시각예술 분야에서도 작업을 계속 해왔다. 2008년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에서 스미스의 폴라로이드 사진과 드로잉 250여 점을 전시했고, 2016년엔 파리 갈리마르 갤러리에서 그의 손글씨와 원고, 사진과 드로잉 등을 전시하기도 했다.
"시를 쓰든, 그림을 그리든 처음부터 문제 의식을 갖거나 주제를 정하지 않아요. 그저 작품 자체로서 훌륭한 작품이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예술의 목적은 세대 간의 소통이라고 생각해요. 지나간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가 대화하는 셈이죠. 예술가가 직접 세상의 변화에 개입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목소리를 내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스미스는 글을 쓰고, 여전히 공연을 하면서 인권과 환경을 위한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딸인 제시 파리 스미스와 설립한 비영리 단체 '패스웨이 투 파리Pathway to Paris'는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한 실질적인 해결책을 찾는데 힘쓰고 있다. 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