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하, 〈색장갑〉, 1957, 캔버스에 유화 물감, 468×62cm, MMCA 소장
김종하, 〈색장갑〉, 1957, 캔버스에 유화 물감, 468×62cm, MMCA 소장
현대미술은 잘 몰라도 초현실주의는 좋다는 사람이 많다.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현실 너머의 세계를 꿈꾸고 싶어하는 현대인의 욕구를 정확히 충족하기 때문이다. 살바도르 달리가 그린 작품(기억의 지속) 속 녹아 흐르는 회중시계가 대표적인 예다.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재를 사실적인 기법으로 그렸지만, 전체적으로는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이다. 그 차이에서 오는 놀라움과 즐거움이 초현실주의의 인기를 만들었다.

근현대 한국에도 매력적인 초현실주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있었다. 서울 정동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은 이들의 면면을 소개하는 전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20세기 한국미술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을 발굴해 재조명하는 ‘근대미술가의 재발견’ 시리즈의 일환이다. 전시를 기획한 박혜성 학예연구사는 “그동안 한국 미술사 연구가 추상미술과 민중미술에 집중되면서 방계인 초현실주의는 잘 알려지지 못했다”며 “초현실주의 작가들을 조명하기 위해 지난 7년간 전시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전시 1부는 이중섭, 천경자 등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작가들의 작품으로 시작한다. 박 학예사는 “아이들과 여인 등을 그린 이중섭의 그림도 환상적인 장면을 자유롭게 표현한 그림이 많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와 맞닿아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2~4부에서는 김욱규·김종남·김종하·신영헌·김영환·박광호 등 작가 여섯 명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이름은 다소 생소하지만, 한국 현대사의 고통 속에서 작품 활동에만 매진하며 보석 같은 작품을 남겼던 이번 전시의 주인공들이다.
김종남(마나베 히데오), 〈수변(水邊)〉, 1941, 캔버스에 유화 물감, 1235x161cm, 이타바시구립미술관
김종남(마나베 히데오), 〈수변(水邊)〉, 1941, 캔버스에 유화 물감, 1235x161cm, 이타바시구립미술관
김종남(마나베 히데오), 〈나의 풍경(ぼくの風景)〉, 1980, 캔버스에 유화 물감, 73x915cm, 유족 소장
김종남(마나베 히데오), 〈나의 풍경(ぼくの風景)〉, 1980, 캔버스에 유화 물감, 73x915cm, 유족 소장
김종남(1914∼1986)은 경남 산청군에서 태어나 15세에 홀로 일본 교토로 건너갔다. 일본인과 결혼한 뒤에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출신을 숨겼고, 임종 직전에야 자녀들에게 자신이 한국인임을 알렸다. 그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작품 속에는 격동의 현대사에 휩쓸린 개인으로서의 불안과 공포, 음울함이 녹아 있다. ‘나의 풍경’ 속 작가 머리 위의 부서진 폭격기에서는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가, ‘수변’ 속 숨이 막힐듯한 빽빽하고 음울한 수풀에서는 평생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고통이 그대로 느껴진다.

함흥 출신의 김욱규(1911~1990)는 1·4 후퇴 때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두고 월남한 뒤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했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창작에 전념했지만 판매는커녕 전시조차 열지 못했다. 그의 첫 개인전은 세상을 떠난 뒤 장남이 1991년 마련한 유작전이었다. 가족과의 생이별과 세상으로부터의 단절, 가난에 대한 절망이 담긴 음울하면서도 환상적인 작품들이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날개가 찢어진 채 나뭇잎 위에 앉아있는 날벌레를 그린 ‘제목 없음’이 대표적이다. 김종하(1918~2011)는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초현실주의를 배워온 화가다. ‘색장갑’은 묘하게 성(性)적인 분위기와 신비로움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김욱규, 제목 없음, 1960년대 중반-1970년대 초, 캔버스에 유화 물감, 60x50cm, 유족 소장
김욱규, 제목 없음, 1960년대 중반-1970년대 초, 캔버스에 유화 물감, 60x50cm, 유족 소장
신영헌, 〈신라송〉, 1968, 캔버스에 유화 물감, 1617×1295cm, MMCA 소장
신영헌, 〈신라송〉, 1968, 캔버스에 유화 물감, 1617×1295cm, MMCA 소장
박광호, 〈반도(半島) 환상〉 1970년대, 캔버스에 유화 물감, 909×725cm,  MMCA 소장
박광호, 〈반도(半島) 환상〉 1970년대, 캔버스에 유화 물감, 909×725cm, MMCA 소장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 속 오브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박광호(1932~2000), 이중섭에게 그림을 배웠지만 미술계와는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초현실주의 작품세계를 추구한 김영환(1928~2011), 한국의 역사와 비극적인 현대사 등을 초현실주의와 결합한 신영헌(1923~1995)의 작품들도 전시장에 걸려 있다.

일반 대중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 많다. 신선한 작품들을 통해 그간 몰랐던 한국 근현대미술의 다양한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다. 박 학예사는 “세상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평생 자신만의 초현실주의 작품 세계를 추구한 작가들”이라고 소개했다. 전시는 7월 6일까지.

성수영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