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네이버 영화
출처:네이버 영화
"두 번째 진주만 공습이 시작됐다."

1980년대 미국에서는 모처럼 '반일(反日) 감정'이 싹텄다. 1941년 일본 전투기 제로센이 진주만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1980년대는 일본의 히타치, 미쓰비시, 도시바, 소니, 도요타 등이 미국 제조업체를 박살 내자 미국 언론은 '제2의 진주만 공습'이 시작됐다고 표현했다. 이즈음에 미국 도심에서는 근로자들이 일본 제품을 깨부수는 퍼포먼스까지 시작됐다.

1985년 9월 22일. '반일 감정'을 등에 업은 미국은 일본과 독일 영국 프랑스 등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를 뉴욕 플라자호텔로 부른다. 여기서 미국은 일본의 엔화 가치를 달러 대비 절상하는 합의를 끌어낸다. '플라자합의'로 불리는 이 합의는 일본 기업의 수출 경쟁력 상실과 '거품 경제'를 촉발한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초래하는 계기도 됐다. 트럼프 2기 정부가 재차 각국의 환율을 문제 삼고 있다. 한국에도 환율을 놓고 협상하자는 뜻을 내비쳤다. 일본을 망가뜨린 '플라자 합의' 악몽이 한국에 엄습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커졌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이뤄진 ‘2+2 통상 협의’ 결과 브리핑에서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이 환율 부분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고 밝혔다. 미국 재무부의 이런 제안은 양국 환율 문제를 이번 통상 협의의 주요 의제로 올리겠다는 의도로 풀이됐다.

원화 약세가 미국의 무역적자를 불러온 것이라며 압박을 시도할 수 있다는 평가가 많다. 다음 달 나오는 미국 재무부의 환율보고서를 지렛대 삼아 압박 수위를 높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미국은 한국은 지난해 11월 환율보고서에서 한국을 관찰대상국으로 지정했다. 관찰대상국은 미국의 제재를 받는 환율조작국의 전 단계 일종의 경고 의미를 담고 있다. 한국의 달러 대비 원화가치는 작년 11월보다 더 떨어진 만큼 관찰대상국은 유지할 전망이다.

하지만 최근 원화가치 약세는 정치적 불확실성 등에서 비롯했다는 것이 정부의 평가다. 여기에 외환당국은 지난해 4분기 원화가치 하락 속도를 늦추기 위해 외환시장에서 37억5500만달러를 순매도하기도 했다. 정부가 협상 과정에서 이 같은 점을 바탕으로 미국에 대한 설득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日 경제 박살낸 유령"…40년 만에 한국 공습 노린다 [김익환의 부처 핸즈업]
하지만 스티브 미란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이 지난해 11월 발표한 '미란 보고서'를 보면 미국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미국 제조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달러가치 절하를 추진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는 트럼프 정부 관세정책의 근간이 됐다는 평가다. 미국과 교역에서 상당한 무역흑자를 올린 한국을 비롯한 주요 교역국도 떨고 있다. 달러대비 자국 통화가치를 절상하는 협상에 억지로 끌려가게 생겼다는 우려도 높다. 제2의 '플라자 합의'의 희생양이 될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일본 경제 흐름과 비슷한 경로를 밟는 한국의 우려가 특히 크다. 플라자 합의로 일본의 제조업 경쟁력은 허물어졌고, '거품 경제'는 붕괴한 바 있다. 1985년 일본의 경제 상황과 현재 우리의 모습이 상당히 흡사하다. 세계 경제 상황도 흡사하다.

미국은 1970년대 닥친 '스태그플레이션(고물가 속 경기침체)'에 대응해 기준금리를 1980년 3월 연 19.85%까지 높였다. 그만큼 달러 가치는 치솟았고, 조달금리가 높아지면서 미국 제조업체들의 경쟁력은 나빠졌다. 강달러에 수출경쟁력이 약화됐고, 고금리에 투자유인이 약화된 탓이다. 탄탄한 제조업 경쟁력과 저금리로 무장한 일본은 미국의 공백을 메우면서 세계 최강의 제조 강국으로 떠올랐다.

미국은 1985년 플라자합의로 대응했다. 플라자 합의 이후 2년 동안 달러화 대비 엔화가치는 65.7%나 절상됐다. 일본 정부는 수출경쟁력 약화를 우려해 시중에 돈을 풀었다. 1986년 연 5%였던 기준금리를 1년 새 연 2.5%로 끌어내렸다. 불어난 유동성은 부동산과 주식으로 흘러갔다. 1987년 한 해에만 도쿄의 평균 땅값은 68.8% 올랐다. 하지만 제조업 경쟁력은 서서히 한국과 중국, 대만 등으로 넘어갔다. 삼성전자가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보한 것도 이 시점이다. 결국 수출 경쟁력 상실과 자산 거품 붕괴가 겹친 1990년대 이후 일본은 장기침체의 길을 걷게 된다.

올 1분기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0.2%를 기록하는 등 침체 초입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많다. '내수 쇼크'의 영향이 상당하다. 그나마 수출로 버티고 있다. 한국과 미국이 환율을 통상 협상 테이블에 올렸다는 데 대한 우려가 높을 수밖에 없다. 시장과 재계가 초긴장 상태로 이번 협상 추이를 지켜보는 배경이다.

김익환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