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남동부 쪽으로 약 500km 떨어진 생테티엔(Saint-Étienne) 외곽 도시 피르미니(Firminy)의 생 피에르 성당(Église Saint-Pierre)에서 현대 디자인계 거장 마탈리 크라세(Matali Crasset)의 전시가 2026년 1월 11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올해 13회를 맞이하는 생테티엔 국제 디자인 비엔날레에 크라세가 큐레이터로 임명된 것을 계기로 기획되었다.

르코르뷔지에의 '피르미니- 베르' 지구

크라세 전시가 열리는 생 피에르 성당은 모더니즘 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며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건축가 중 한 명인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마스터플랜을 세운 이상적인 도시 '피르미니 르코르뷔지에 건축 집합체(Site Le Corbusier de Firminy)'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전시 관람을 위해 이곳을 방문한다면 건축 집합체도 둘러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피르미니 생 피에르 성당 / 사진. © FLC / ADAGP / Olivier Martin-Gambier, 출처. Fondation Le Corbusier 홈페이지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피르미니 생 피에르 성당 / 사진. © FLC / ADAGP / Olivier Martin-Gambier, 출처. Fondation Le Corbusier 홈페이지
1950년대 피르미니는 탄광 노동자들의 주거지역이었다. 가난한 시민들의 삶을 향상하고 도시를 발전시키기 위해 피르미니 시장은 세계적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에게 피르미니-베르 지구(Firminy-Vert site)를 설계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르코르뷔지에는 건축 집합체의 첫 출발점이 될 복합 주거 단지의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기능과 예술성이 조화를 이루면서 주거와 휴식, 스포츠, 문화, 종교시설을 조합시킨 이상적인 주거 환경을 설계했다. 소득이 낮은 서민층만 입주가 허용되는 아파트의 마지막 층에는 초등학교가 들어섰다. 아이들은 엘리베이터만 타면 등하교가 가능해 부모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피르미니 문화센터 (Maison de la Culture) / 사진. © FLC / ADAGP / Olivier Martin-Gambier, 출처. Fondation Le Corbusier 홈페이지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피르미니 문화센터 (Maison de la Culture) / 사진. © FLC / ADAGP / Olivier Martin-Gambier, 출처. Fondation Le Corbusier 홈페이지
크라세의 전시가 열리는 생 피에르 성당은 현재 종교 건축물의 기능을 벗어나 음악회와 전시회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 특별 미사는 진행한다.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이 성당은 그가 1965년 갑자기 사망함에 따라 1973년에 착공하게 되었고 행정적,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30년간 공사가 중단된 후 2006년에 완공되었다.
[좌] 33m 높이의 생 피에르 성당 내부 / 사진. © Olivier Martin-Gambier, 출처. Fondation Le Corbusier 홈페이지 [우] 미사 제대 뒤로 설치된 오리온 별자리의 모습.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성당 안에 빛을 전한다 / 사진. © 정연아
[좌] 33m 높이의 생 피에르 성당 내부 / 사진. © Olivier Martin-Gambier, 출처. Fondation Le Corbusier 홈페이지 [우] 미사 제대 뒤로 설치된 오리온 별자리의 모습.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성당 안에 빛을 전한다 / 사진. © 정연아
행복한 디자이너 마탈리 크라세

1965년에 태어나 프랑스 국립 산업 디자인 학교(ENSCI-Les Ateliers)에서 수학한 크라세는 '디자인 & 행복한 여인’의 합성어인 '디자이뇌르즈(Design + heureuse)', 즉 행복한 디자이너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크라세는 항상 디자인이 현대사회와 일상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의문을 가지고 프로젝트에 임한다. 그녀는 프로젝트의 맥락과 그에 제기된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 역사, 철학, 인류학, 사회학 분야에 다각적인 조사와 연구를 주저하지 않는다.

크라세는 지난 30년간 오브제와 가구 디자인뿐만 아니라 건축과 시노그라피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뉴욕의 뉴욕현대미술관, 파리의 퐁피두 센터 등 전 세계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생 피에르 성당에서 전시 설명중인 마탈리 크라세 / 사진. © 정연아
생 피에르 성당에서 전시 설명중인 마탈리 크라세 / 사진. © 정연아
지속 가능한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준비

'우리의 진흙 발(Nos pieds d’argile)'이라는 전시 타이틀은 인간과 자연환경의 관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관찰하여 지속 가능한 미래를 설계하려는 메시지가 담긴 친환경 디자인 프로젝트이다.
[좌] 전시 '우리의 진흙 발' 홍보물이 부착된 생 피에르 성당 외관 [우] 인간과 땅을 이어주는 듯한 청동 작품 / 사진. © 정연아
[좌] 전시 '우리의 진흙 발' 홍보물이 부착된 생 피에르 성당 외관 [우] 인간과 땅을 이어주는 듯한 청동 작품 / 사진. © 정연아
생 피에르 성당 전시관은 일반적인 전시 공간과는 완전히 다르다. 전시 공간은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밀폐된 공간이 서로 연계되어 있으며, 문화재로 지정돼 못을 박을 수 없어 벽에 작품을 걸기가 어렵다. 게다가 노천 콘서트장처럼 시멘트 계단과 좌석이 설치되어 있다.
'우리의 진흙 발' 전시 전경 / 사진. © Arnaud Frich
'우리의 진흙 발' 전시 전경 / 사진. © Arnaud Frich
전시는 우리 삶의 기반이 될 미래의 친환경 주택을 짓기 위한 3단계를 중심으로 기획되었다.

1단계 : 우리가 가진 토대를 고쳐 나간다.

첫 번째 전시 공간에는 피르미니-베르 지구에 설치된, 주민들이 함께 사용하던 공동 빨래 건조대에서 영감을 얻은 돔 모양의 나무 구조물이 설치되었다.

이 돔은 고대 그리스 도시의 삶의 중심지이자 회의 장소였던 일종의 아고라로서 토론 주제가 공지되고, 토론 참가자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는 민주적인 모임을 가진다. 나무 의자들을 레고 블록처럼 끼워서 맞출 수 있는 구조인데, 의자를 하나둘씩 빼내면 중앙 구조물 아고라는 뼈대만 남게 된다. 돔 내부에는 토론 내용을 받아 적는 사람을 위한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다.
나무 돔 아고라에서 의자를 분해한 모습 / © Arnaud Frich
나무 돔 아고라에서 의자를 분해한 모습 / © Arnaud Frich
나무 돔 아고라의 세부. 토론 공지사항이 붙어있으며, 구조물에 의자를 레고 블록처럼 끼워 맞출 수 있다 / 사진. © 정연아
나무 돔 아고라의 세부. 토론 공지사항이 붙어있으며, 구조물에 의자를 레고 블록처럼 끼워 맞출 수 있다 / 사진. © 정연아
2단계 :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토대를 알고 친화하려고 노력한다.

두 번째 전시 공간에는 우리가 사는 주변 환경에 대한 애착을 담아내며 자연 생태계를 재분석하여 인간이 다시 생물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를 열망하는 상징적인 나무 구조물이 설치되었다.

오두막을 이루고 있는 6각형 나무판에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 중 프랑스 중서부 베지에르(Vézières)의 소도시에서 만난 동식물들의 도감이 걸려있다.
나무 오두막에서 새 도감을 볼 수 있다 / 사진. © Arnaud Frich
나무 오두막에서 새 도감을 볼 수 있다 / 사진. © Arnaud Frich
3단계 : 우리는 새로운 토대를 재설계한다.

나무 돔에서 토론된 내용을 취합하고 주변 환경을 인지하고 배우면서, 3단계에서는 인간과 환경을 고려한 미래의 친환경 주택을 설계한다.

크라세가 설계한 이 주택은 완충지역으로 땅에서 약 1m 정도 올라와 있고 지붕에는 태양열 패널을 설치했다. 실내에는 폐기물을 이용하여 난방과 조리를 할 수 있으며, 분리수거 시스템과 실내 및 실외를 체계적으로 기획하여 효율적인 일상생활을 유도하고 있다.
미래의 친환경 주택 모델 / 사진. © Arnaud Frich
미래의 친환경 주택 모델 / 사진. © Arnaud Frich
지속 가능한 친환경 콘셉트 주택을 보여주는 이번 전시를 통해 자연과 환경 보존을 위해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이 어떤 것이 있을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피르미니=정연아 패션&라이프스타일 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