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진행 중인 백정기 개인전 'is of' 전시 전경. ⓒ 2025 ARARIO MUSEUM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진행 중인 백정기 개인전 'is of' 전시 전경. ⓒ 2025 ARARIO MUSEUM
순간은 영원하지 않기에, 우리는 카메라를 꺼내 든다. 기억은 쉽게 휘발되기 마련이라,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을 되뇌며 언젠가 꺼내 볼 날을 기약하곤 한다. 그런데 만약 사진이 남지 않는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옅어지는 기억처럼, 사진도 서서히 흐려진다면? 그런 사진도 여전히 사진이라 부를 수 있을까.

백정기 작가의 작품은 이 같은 의문을 동반한다. 작가는 자연 풍경을 촬영한 후, 그 장소에서 단풍잎이나 꽃을 채취한다. 주워 모은 식물로 잉크를 만들어 사진을 인화한다. 특별한 잉크로 출력한 사진은 공기 중의 산소와 만나면서 점점 색이 바래고 흐려지는데, 그는 이 과정을 늦추기 위해 특수 제작한 장치에 작품을 넣어 전시한다.

작품에 병렬된 욕망과 섭리

그의 개인전 ‘is of’가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에 열리고 있다. 전시장 벽에 걸린 작품들은 복잡한 회로 장치와 실린더가 부착돼 있어 일반적인 사진과는 다른 낯선 인상이다. 작가는 사진 표면을 에폭시 레진으로 덮은 후 장치 안에 넣어 산소와의 접촉을 막는다. 그가 직접 만든 이 챔버는 산소를 비활성기체인 질소로 치환해 색소와의 화학 반응을 막아 사진 속 색을 의도적으로 가두는 역할을 한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위치에 배치한 작품 'is of 내장산 2024-5'. ⓒ 2025 Jungki Beak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위치에 배치한 작품 'is of 내장산 2024-5'. ⓒ 2025 Jungki Beak
전시장에 직접 나와 설명을 보탠 작가는 “이 챔버에는 사진을 통제하고 구속하는 인본주의적 기술력이 담겨 있다”며 “제 작품에는 변화하려는 자연과 붙잡아 두려 하는 인간의 욕망이 동시에 드러난다”고 전했다. 작가의 의도에 따라 벽이 아닌 곳에 전시한 작품도 있다. 그는 “초창기 풍경 사진, 특히 19세기 미국 서부를 촬영한 사진은 그 지역을 개척하고 정복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내재돼 있다”며 “여전히 우리 무의식에 자리 잡은 이 욕망을 환기하기 위해 관람객이 작품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배치함으로써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했다”고 덧붙였다.
시간이 흘러 색이 바랜 작품도 함께 전시했다. ⓒ 2025 ARARIO MUSEUM
시간이 흘러 색이 바랜 작품도 함께 전시했다. ⓒ 2025 ARARIO MUSEUM
소멸로 완성되는 본질

이 특별한 시리즈의 탄생은 2011년 미국 코네티컷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빼어난 자연 환경으로 잘 알려진 미국 코네티컷주에서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 중이던 그는 특별한 사진을 위한 특이한 발상을 떠올린다. 비싼 기성 잉크 대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데이지꽃이나 풀, 비트로 잉크를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진은 시간이 지나며 색이 흐려지다 사라지지만, 바로 그 ‘사라짐’이야말로 곧 그가 말하고자 한 작품의 핵심이자 본질이었다.
 is of 두물머리 2024-1, 2025, 단풍잎과 코스모스 꽃에서 추출한 색소로 잉크젯 프린트, 에폭시 코팅, 아크릴 밀폐 챔버, 산소제거장치, 99x71x16(d)㎝. ⓒ 2025 Jungki Beak
is of 두물머리 2024-1, 2025, 단풍잎과 코스모스 꽃에서 추출한 색소로 잉크젯 프린트, 에폭시 코팅, 아크릴 밀폐 챔버, 산소제거장치, 99x71x16(d)㎝. ⓒ 2025 Jungki Beak
이렇게 시작된 ‘is of’ 시리즈는 이후 점진적인 변화를 거듭해 왔다. 특히 올해 선보이는 작품은 이전 작업과 비교되는 세 가지 특징이 포착된다. ‘인물의 부재’와 ‘그림자의 등장’ 그리고 ‘형식의 확장’이다. 기존에 촬영한 사진에는 종종 사람이 등장했다. 그러나 작가가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에 변화가 생기면서 이번 작업에는 인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자연을 경외의 대상으로 바라보던 초기의 시선이 점차 자연과의 일체화를 추구하면서 생긴 변화다.

대신 그림자가 등장한다. 작가는 이에 대해 “그림자가 자연의 본질을 해친다고 생각해 의도적으로 배제해왔지만 이제는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됐다”며 “그림자가 등장한다는 것은 ‘내가 포착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내가 감각하는 자연뿐’이라는 내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멀리서 바라본 속리산 풍경을 56개의 이미지로 조각 내어 보여주는 작품 'is of 속리산 2024-4'. ⓒ 2025 Jungki Beak
멀리서 바라본 속리산 풍경을 56개의 이미지로 조각 내어 보여주는 작품 'is of 속리산 2024-4'. ⓒ 2025 Jungki Beak
양쪽에 날개를 단 제단화(Winged Altarpiece) 형식의 작품 'is of 두물머리 2024-2'. ⓒ 2025 Jungki Beak
양쪽에 날개를 단 제단화(Winged Altarpiece) 형식의 작품 'is of 두물머리 2024-2'. ⓒ 2025 Jungki Beak
이번 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작품의 형식이다. 전시에 소개된 작품 ‘is of 두물머리 2024-2’는 중세 교회나 성당의 제단 뒤 공간을 장식하는 제단화(Winged Altarpiece)를 연상케 한다. 제단화는 평소에는 접어두었다가, 일요일이나 성일 같은 특별한 날에만 대중 앞에 펼쳐 보이는 형식으로, 양쪽에 날개처럼 접히는 구조를 지닌다.

작가는 이 형식을 차용해 의미를 담았다. 제한된 관람 시간동안에만 마주할 수 있는 제단화가 지닌 ‘지금 여기’의 시간성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색되다 소멸해 한 순간도 완전히 동일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작품을 결합해 그만의 아우라를 드러낸다. 전시는 8월 17일까지.

강은영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