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미술 걸작 떴다…들썩이는 '아트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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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미술 성지' 도쿄 아트 투어
'동서양 미술 성지' 도쿄 아트 투어


입장권 없이도 즐길 수 있는 미술관 앞뜰의 오귀스트 로댕 3종 세트 ‘생각하는 사람’ ‘칼레의 시민’ ‘지옥문’이나 미술관이 운영하는 ‘스이렌(수련)’이란 이름의 레스토랑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의 대표 컬렉션은 클로드 모네 등 인상파 회화와 로댕을 비롯한 19세기 조각 작품이다. 서양미술 명작들이 왜 이곳에 모여 있을까. 그 시작엔 한 남자가 있다. 100년 전 유럽을 다니며 미술품을 사 모은 일본 기업인 마쓰카타 고지로다. 국립서양미술관은 그가 수집한 컬렉션을 발판으로 1959년 문을 열었다.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지하철역’으로 기네스 기록에 오른 신주쿠역. 세계인이 북적이는 이 거리엔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가 있다. 일본 최초 손해보험사 솜포재팬의 미술재단이 운영하는 솜포미술관 소장품이다. ‘해바라기’를 만날 수 있는 아시아 유일 미술관인 솜포미술관은 기업이 사회공헌을 목적으로 세운 미술관이기도 하다. 세계적 타이어 회사 브리지스톤타이어를 창업한 이시바시 쇼지로의 아티존미술관, ‘철도왕’ 네즈 가이치로의 네즈미술관도 마찬가지다.
중후한 명작도 좋지만 더 반짝이는 거리에서 통통 튀는 동시대 미술과 만나고 싶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곳 역시 많다. 도쿄 시민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동네이자 새로운 문화 거점으로 자리 잡은 롯폰기다. 롯폰기 미술 중흥 프로젝트의 주역은 모리미술관, 국립신미술관, 산토리미술관을 잇는 ‘롯폰기 아트 트라이앵글’이다. 이곳에도 미술을 사랑한 기업인이 있다. 모리미술관 뒤엔 ‘문화 도심’을 꿈꾼 모리 미노루 모리빌딩 회장, 산토리미술관 뒤엔 일본을 대표하는 위스키 ‘히비키’로 유명한 산토리를 창업한 도리이 신지로가 있었다.
유럽 돌며 1만점 모은 日기업인…미술로 이뤄낸 '교라쿠의 꿈'
日국립서양미술관이 자랑하는 '마쓰카타 컬렉션'

‘마쓰카타 컬렉션’ 국립서양미술관

마쓰카타는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걸작을 대거 사들였다. 특히 ‘수련’을 얻기 위해 1921년 프랑스 인상파 거장 모네의 작업실을 찾아간 일화는 유명하다. “거장의 그림을 직접 본 적 없는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당신의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는 그의 진정 어린 설득에 모네는 수십 점을 내줬다.
마쓰카타의 사업은 그러나 1927년 ‘쇼와 공황’ 여파로 큰 타격을 받았다. 빚을 갚기 위해 주요 소장품을 처분하기에 이른다. 심지어 영국 런던에 있던 소장품은 1939년 화재로 모두 잃었다. 다만 프랑스 파리에 보관하던 작품 약 400점은 일본의 2차 세계대전 패전 뒤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따라 모두 프랑스 정부에 귀속됐다.

국립서양미술관은 2007년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2016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소장품은 계속 늘어 현재 약 6000점에 이른다.
신주쿠의 ‘해바라기’ 솜포미술관

시작은 솜포재팬 전신 야스다화재해상이 1976년 본사 42층에 개관한 ‘도고 세이지 미술관’이었다. 야스다화재 인쇄물 디자인을 맡았던 일본의 서양화가 도고 세이지에게 컬렉션을 기증받아 주로 그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기 위해 마련됐다. 도고는 20대 시절 프랑스에서 파블로 피카소에게 독자적인 스타일을 관철하는 자세를 배우고, 서양화의 전통 기법을 연구했다. 귀국 후 현대 여성의 새로운 이상형을 만들어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이 미술관은 1987년 ‘해바라기’를 구입하며 컬렉션을 확장했다. 이 ‘해바라기’는 고흐가 존경했던 화가 폴 고갱과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동거한 1888년 말께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미술관 앞마당엔 ‘해바라기’ 도판 복제화를 두고 작품을 손으로 만지고 매력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이곳이 신주쿠의 예술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이유다.
기업이 사회공헌을 목적으로 미술관을 설립한 지 44년이 지난 2020년. 이 미술관은 같은 건물 부지에 완공된 신관으로 이전하며 솜포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예술 조각 같은 6층짜리 건물은 도고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부드러운 곡선을 입혔다. 지난 3월 말까지 누적 방문객 690만 명을 기록했다.
日 타이어의 아버지가 낳은 아티존미술관


1950년 첫 미국 방문 때 도심 빌딩에 있던 뉴욕근대미술관에 강한 감명을 받은 이시바시는 도쿄 교바시에 건설 중인 본사 빌딩 2층을 서둘러 미술관으로 꾸며 자신의 컬렉션을 일반에 공개하기로 결심했다. “좋아하는 그림을 골라 사는 것이 무엇보다 즐겁지만, 원래 이런 명품은 개인이 소장할 게 아니다. 미술관을 설립해 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오랜 소원이었다.” 그렇게 1952년 브리지스톤미술관이 개관했다.

구마 겐고가 설계…사계절 정원 즐기는 미술관 속 '네즈카페'
日·동양 고미술 성지 '네즈미술관'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패션 거리 중 하나인 도쿄 오모테산도는 세계 정상급 건축가의 경연장이기도 하다. 디올, 꼼데가르송, 프라다의 화려한 쇼윈도에 빠져 걷다 보면 갑자기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40m나 이어진 대나무 숲길이다. 숲길이 끝나는 곳에 다른 세계의 입구, 미술관 정문이 드러난다. 1941년 개관한 동양 고미술 전문 네즈미술관이다.네즈미술관은 도부철도 사장 등을 지낸 일본의 ‘철도왕’ 네즈 가이치로가 수집한 일본과 동양의 고미술 컬렉션을 보존·전시하기 위해 설립됐다. 야마나시현에서 태어난 네즈는 젊은 시절부터 고미술품에 관심을 가졌다. 1896년 도쿄에 진출한 뒤 기업가, 정치인으로 활약하는 한편 다도에 빠지며 미술품 수집에 더욱 열을 올렸다.
그의 유지를 이어 2대 네즈가 1940년 재단을 설립하고, 이듬해 미술관을 열었다. 1945년 전쟁으로 전시실과 다실 등 대부분이 소실됐지만, 1954년 본관을 재건했다. 2009년 새로 지은 본관은 일본 전통가옥을 연상시키는 큰 지붕이 특징이다. 현대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 구마 겐고가 설계했다. 새 본관은 회화, 서적, 청동기, 다도 미술 등 각 특성에 맞춘 여섯 개 갤러리를 갖췄다. 본관 뒤로 펼쳐진 1만7000㎡에 달하는 정원에는 네 동의 다실까지 마련됐다. 정원 내 사계절 경치를 배경으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네즈카페도 유명하다. 미술관보다 정원 속 카페에 입장하려는 사람들로 늘 긴 대기줄이 생길 정도다.
日현대미술 트렌드 이끄는 '롯폰기 아트 트라이앵글'
모리·산토리·국립신미술관 '미술 중흥 프로젝트 주역'

하늘로 올라간 모리미술관

모리미술관은 화려한 현대적 도시에서 미술을 즐기려는 사람들, 도쿄에 매혹돼 몰려든 외국인 관광객을 사로잡기 위해 ‘현대성’과 ‘국제성’을 내세운다. 다양한 지역의 선구적 미술, 건축, 디자인 등 창조 활동을 독자적 시선으로 소개한다. 현재는 ‘머신 러브: 비디오 게임, AI와 현대 아트’를 주제로 약 50점을 전시하고 있다. 모리미술관에 올라가기 전 예고편을 보듯 지상에서도 아트를 체험할 수 있다. 모리타워 앞마당엔 낯익은 거대한 거미가 알을 품고 있다. 미국 뉴욕현대미술관, 스페인 구겐하임미술관, 프랑스 퐁피두센터, 영국 테이트모던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도 있는 대형 거미 조각이다. 프랑스 출신 조각가 루이즈 부르주아의 ‘마망’이다. 마망 옆에는 8m에 달하는 장미꽃 한 송이가 관람객을 굽어본다. 조각과 공간, 환경이 맺는 관계에 주목하는 독일 작가 이자 겐츠켄의 ‘장미’다.
‘소장품 없는’ 국립신미술관

그해 1월 개관한 국립신미술관은 구로카와의 유작이다. ‘숲속 미술관’을 콘셉트로 설계한 이 미술관 전면은 파도처럼 물결치는 유리 커튼월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린다. 원뿔형 출입구와 함께 독특한 외관을 연출한다.
탁 트인 1층 로비에서는 유리 너머 아오야마공원의 사계절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미술관을 통한 도시와 자연의 ‘공생’이다. 국립신미술관은 소장품이 없다. 그 대신 일본 최대 규모 전시 공간(1만4000㎡)을 활용해 다양한 전시회를 여는 것으로 유명하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오르세미술관·퐁피두센터 등 유명 미술관 작품을 소개하는 블록버스트급 전시를 열어왔다. 현재는 ‘거실 모더니티’를 주제로 1920~1970년대 유명 건축가의 단독주택 걸작을 소개하고 있다.
드넓은 미술관을 걷다 지친 다리를 쉬게 할 곳도 충분하다. 미술관 중간중간 놓인 명품 의자에 앉아볼 수 있는 것이 매력이다. 덴마크 건축가 겸 가구 디자이너 한스 베그네르의 ‘Y 체어’, 아르네 야콥센의 ‘스완 체어’ ‘세븐 체어’ ‘에그 체어’ 등이 대표적이다. 언제 방문해도 도심 속 자연을 벗 삼아 커피와 브런치를 즐기는 도쿄 중장년층을 쉽게 볼 수 있다.
‘생활 속 미’ 산토리미술관

기업 미술관이 보통 설립자 취향대로 작품을 수집·전시하는 것과 달리 산토리미술관은 처음부터 위원회를 만들어 ‘생활 속 미’라는 기본 이념에 맞는 컬렉션을 갖춰왔다. 소장품은 회화, 도자기, 칠공예 등 일본 고미술부터 동서양 유리 작품까지 3000점에 달한다. 국보 1점, 중요문화재 16점도 갖고 있다. 연간 6회가량 기획전을 개최하는데, 매년 방문객 약 30만 명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산토리미술관은 일본 건축가 구마 겐고가 설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구마의 목표는 ‘도시의 거실’ 같은 편안한 미술관을 만드는 것이었다. 전통과 현대 간 융합을 기조로 도쿄라는 시끄러운 도시 속 조용한 거실이 되길 바라며 설계도를 그렸다. 외관은 백자 재질로 만든 세로 격자를 덮어 모던한 감각과 전통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뽐낸다. 실내는 나무와 일본 전통 종이를 사용해 자연의 따뜻함과 부드러운 빛을 표현했다. 바닥재는 일본을 대표하는 양조회사답게 위스키를 숙성하는 오크통을 재활용했다.
日 최초 국립미술관 매년 5회 걸쳐 전시…여행때 놓치지 마세요
73년 역사 도쿄국립근대미술관

1952년 개관한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은 19세기 말부터 현재에 이르는 일본 근현대 미술품을 수집하는 동시에 다양한 전시회를 열어 미술의 가치를 세계인과 공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회화, 판화, 수채, 소묘, 조각, 사진, 영상 등 1만4000점에 달하는 소장품을 갖고 연 5회가량 전시마다 약 200점을 전시한다. 요로즈 데쓰고로의 ‘나체 미인’, 기시다 류세이의 ‘레이코 초상’, 고가 하루에의 ‘바다’, 아이 미쓰의 ‘눈이 있는 풍경’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일본 현대미술 최전선엔 도쿄도현대미술관이 있다. 1995년 문을 연 이 미술관은 일본 전후 미술을 중심으로 약 6000점을 소장하고 있다. 이 컬렉션은 연간 3~4회에 걸쳐 매회 100~200점을 소개한다. 도쿄도현대미술관의 상설전은 전후 현대미술 계보를 대표 작품으로 정리한다. 특히 1960년대를 풍미한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 낯익은 작가의 팝아트 작품을 충실히 갖추고 있다. 기획전도 연간 6~8회 열린다.
도쿄도현대미술관이 하루아침에 수천 점을 소장하게 된 것은 아니다. 소장품의 약 절반은 1926년 개관한 도쿄도미술관에서 가져왔다. 일본 동시대 미술 발표의 장이었던 도쿄도미술관은 전시회 등으로 형성한 약 3000점을 도쿄도현대미술관에 물려줬다.
도쿄=김일규 특파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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