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온 '4色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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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김창열·박서보·이우환
현대미술 대가들의 20년 우정
김환기·김창열·박서보·이우환
현대미술 대가들의 20년 우정

이 네 명의 예술가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한국의 후기 근대 및 현대 화가들이다. 이들의 작품 세계는 서로 달랐지만, 참혹한 시대를 건너온 삶의 궤적은 닮았다. 1950년대 초 6·25전쟁의 여파는 총체적 위기를 가져왔다. 집단적 트라우마와 존재론적 불안에 시달리는 건 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민했다. 예술로서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한국적 정서와 시대 정신에 맞는 새로운 현대성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그 해답 중 하나는 추상이었다.
한국 추상을 대표하는 김환기는 달항아리, 매화 등 전통 소재와 자연 풍경으로 작업하다 미국 뉴욕 체류 시기 화면 전체를 점으로 채워 나가는 ‘전면 점화’로 나아갔다. 박서보와 김창열은 행위 중심의 추상으로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했다. 김창열은 도교적 무아의 사유를 반영한 ‘물방울 연작’ 등으로, 박서보는 절제와 반복을 기반으로 한 ‘묘법 연작’으로 수행의 예술을 극대화했다. 일본 ‘모노하 운동’을 이끈 이우환은 1970년대 초부터 절제된 붓질과 긴장감을 결합한 작업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조형 언어를 만들었다. 프랑스(김창열)와 일본(이우환), 한국(박서보)과 미국(김환기) 등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던 이들은 사실 누구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한국 미술을 어떻게 세계에 알릴 것인가, 한국 미술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며.
독창적인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이들이, 해외여행은 물론 국가 간 통신조차 쉽지 않았던 1960~1970년대를 넘어 수십 년간 끈끈한 소통을 이어왔다는 건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하지만 정말 그랬다. 김창열과 박서보, 이우환 그리고 김환기는 20년 넘는 세월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계 무대에 한국 미술을 알리기 위해 해외 작가와 예술계의 동향 등 정보를 건넸고, 화랑과 비엔날레 등에 서로를 소개했다.
1961년부터 1982년까지 김창열, 김환기, 이우환 그리고 박서보가 주고받은 편지들이 지난 5일 뉴욕에서 최초로 세상에 공개됐다. 뉴욕 기반의 갤러리스트 티나 킴의 제안으로 비평가와 큐레이터, 작가의 가족과 유가족 등이 모두 힘을 합쳐 4년간에 걸쳐 편지들을 모아 필사하고, 해석하고, 기록했다. 그 결과물이 <한국 현대미술의 형성 : 김창열, 김환기, 이우환, 박서보의 서신, 1961-1982>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다.
"서보야, 뉴욕은 잔혹한 도시다" "朴선생님, 인도展 불참 섭섭합니다"
서울-뉴욕-파리-도쿄 오간 서신…K아트 세계화 이끌다
한국을 대표하는 네 명의 거장이 어떻게 힘을 합쳐 전쟁 후 혼란과 재건의 시기를 딛고 섰는지는 그동안 가족들조차 어렴풋하게 알았을 뿐이다. 지금이야 김환기, 박서보, 김창열, 이우환의 작품이 세계 경매 시장에서 수십억원에 팔리고, 주요 미술관과 박물관이 소장하는 등 높은 지위를 얻었지만 이건 불과 10년 안팎의 일이다. 예술가가 주고받은 편지에는 시대의 고뇌와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성, 그 접점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평생 친구였던 박서보와 김창열
박서보는 네 명의 예술가들 중심에 있었다. 김창열과는 1950년대부터 끈끈한 우정을 이어왔다. 넷 중 유일하게 한국에 머무른 작가이기도 하다. 박서보와 김창열은 각각 홍익대와 서울대에서 김환기에게 그림을 배웠다. 전쟁으로 학업이 중단되고, 이후 혼란의 시기를 거치면서도 박서보는 국경을 넘어 진취적인 한국 작가들을 한데 모으는 구심점이 됐다. 서울을 기반으로 동료와 자신의 작품을 세계 각 도시에 보내 전시하고 교류하는 데 가장 열정적이던 인물이다.

뉴욕에서 파리로 간 김창열
1961년 파리비엔날레 참가 이후 김창열은 1965년 서울에서 뉴욕으로 건너갔다. 1963년 브라질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작가이자 커미셔너로 참여한 스승 김환기의 권유가 결정적 계기였다. 당시 마크 로스코의 작품 등에서 영감을 받아 한국적 요소 대신 점화로 옮겨간 김환기는 김창열의 멘토로 뉴욕 이주를 격려했다. 당시 뉴욕은 팝아트, 비디오 아트, 개념미술, 미니멀리즘 등 아방가르드 운동이 활발하던 때. 김창열도 뉴욕 예술계의 움직임을 흡수하며 그림과 조각, 다양한 매체 실험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울한 심경을 박서보에게 편지로 털어놨다. “뉴욕은 잔혹한 도시다. 건물들이 너무 높아서 사람이 살도록 설계된 것 같지 않다. 유령과 악령이 사는 절벽이나 창고처럼 보인다.”(1966년 편지 중)
결국 김창열은 1969년 파리로 이주했고, 경제적 어려움 탓에 마구간에 거주하며 ‘물방울’이라는 그만의 언어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녹록지 않은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김창열과 박서보의 편지 속에는 치열한 고민들이 엿보인다.
“서보야, 건강하고 일 열심히 하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저번에 보내준 고추가루 고치장(고추장) 잘 받아먹고 있으면서 고맙단 말도 못 했다. 그 고치장 볶음은 실로 희한하게 맛이 있더구나. 그걸 먹을 때마다 보람달 같은 네 아내를 회상하게 되는데, 과연 너는 칠성님의 복을 타고난 것이로구나 생각하곤 한다.(중략) 불란서 신회화전이 유럽 순회전을 끝내는 대로 서울전을 제의한다는데 우리 공보관장이 아직도 움직이지를 않아 재촉을 하고 있다만, 미술협회의 건의를 문공부 외무부 장관 명의로 불란서 외무부 장관 앞으로 공문을 띄우는 것이 결국은 거쳐야 할 첩경이 아닐까 한다.(중략) 네 그림의 화랑 접촉을 몇 군데 우선 해보겠다. ‘아트인터내셔널’ 이번 호에 어쩌자고 내 기사가 척 실렸다만, 그저 실려졌다는 것만 대견한 사실이지 기사는 미술사적 견지에서의 해석이 전무하고 오직 세속적인 관심에서만은 가치 있는 언급이라고 생각될 따름이다. 축배를 들어주렴. 연말이 다가온다. 바쁘겠다. 건강하라.”(1975년 12월 7일 김창열이 박서보에게)
첫 만남에 절친이 된 박서보와 이우환
“박선생님이 인도 트리엔날레에 불참가라니 섭섭하기 짝이 없습니다. 나란히 내어서 보이는 기회도 드물 터인데, 항상 박선생님은 너무나 자기를 죽이고 남 일만 생각하시는 감이 들어도, 인제는 나이도 나이인데 제발 체면채리는 것은 그만둡시다. 김구림 씨는 퍽 고생이 많으나 누구보다도 알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힘이 부족해서 여기 대학에라도 적을 두게 해보려 했으나 잘 안되었습니다. 각 국제적인 잡지에 우리나라 현대미술을 소개해주도록 저 나름대로는 쌓아 놓겠으니 서울 가며는 여러 군데 안내 부탁합니다. 서세옥 선생께도 안부 여쭈어 주시기 바랍니다.”(1974년 11월 5일 이우환이 박서보에게 보낸 편지 중)
1968년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회화전을 계기로 교류를 시작한 이우환과 박서보는 이후 한국과 일본 미술계의 가교 역할을 했다. 1972년부터 1975년까지 박서보와 이우환이 주고받은 서신에는 국제적인 예술가를 꿈꾸는 두 사람의 열망이 담겼다. 1973년 이우환은 박서보에게 이렇게 썼다. “도쿄, 베니스, 상파울루를 비롯한 많은 비엔날레가 매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그 목적조차 불분명해지고 있습니다. 현재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전시 중인 한국 작가들을 대규모로 소개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자 좋은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환기, 백남준, 김봉태, 이응노, 김창열, 이성자, 곽인식, 곽덕준 그리고 저와 같은 작가들을 비롯해 해외에서 호평을 받은 한두 명의 작가들을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우환 "50년 다진 단색화…만리타국 선배들과 교류가 큰 힘"
거장들의 편지 어떻게 수집했나
지난 9일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 동쪽 70번가 파크애비뉴의 아시아소사이어티 박물관. 오후 6시가 되자 세찬 비를 뚫고 몰려든 250여 명의 사람들이 강당을 가득 메웠다. <한국 현대미술의 형성(The Making of Modern Korean Art): 김창열, 김환기, 이우환, 박서보의 편지, 1961-1982> 출간을 기념해 세 명의 저자와 이우환 작가(89)의 좌담회를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이날 책의 공동 저자인 정연심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안휘경 구겐하임 아시아 미술 이니셔티브 큐레이터, 그리고 실시간 영상으로 참여한 정도련 홍콩 M+ 수석 큐레이터가 함께했다.

“박서보 선생을 처음 만난 건 (내가 도쿄에 체류하고 있던) 1968년 도쿄에서였어요. 3년 뒤 파리 비엔날레에 가면서 김창열 선생을 만났죠. 말도 안 통하고,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은 나를 몽땅 책임지고 동행해 줬어요. 김창열 선생은 문학청년이었어요. 두 분 다 스무 살이 넘어 만났지만, 한국 미술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고민하던 때였기 때문에 서로 간에 대화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 인연이 점점 넓어지고 진해져 오래 이어졌죠. 단색화가 갑자기 나온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미 1960~1970년대 일찍이 박서보, 김창열, 김환기, 정상화 선생 등이 모두 해외에서 세계 미술의 흐름을 예리하게 보고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어딘가에 속하지 못한 채 계속 떠도는 마이너리티의 삶이 어쩌면 창작의 기반이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많은 동료와 선배들도 비슷한 어려움 속에서 살아남는 지혜를 터득한 걸 보면 그것이 ‘반도의 기질’인가 싶기도 합니다. 40년을 해오다 보니 지금은 국적이나 선입견을 제외하고 작품 자체로 봐주는 비평이 많습니다. 한국 중국 등 아시아의 힘이 커진 결과일 테니 감사한 일이죠. 함께 치열한 생각을 나눈 선배들이 계셨기에 그런 과정을 버텨낼 수 있었고요.”
이 책의 출간과 전시 프로젝트는 2021년 파리에서 유품을 정리하던 김창열 작가의 차남 오안 김에서 시작됐다. 그는 박서보 선생에게서 온 편지 한 통을 뉴욕의 티나킴갤러리에 건넸고, 알 수 없는 한자어가 뒤섞인 편지를 받은 티나 킴이 정연심 교수에게 해독을 의뢰했다. 정 교수는 당시 투병 중이던 박서보 선생을 찾아가 서신들을 함께 열람하고 대화했다. 그 대화는 박서보와 이우환과의 편지, 이우환과 김환기의 편지 등까지 이어져 대서사가 펼쳐졌다.
정 교수는 “4년간 마치 꼼꼼한 뜨개질을 하거나 퍼즐을 맞춰가듯 작업했는데, 한국 미술사에 알려지지 않은 귀중한 이야기들이 하나씩 드러났다”며 “특히 박서보 선생은 다른 작가들의 전시 기록과 편지까지 모든 역사를 자세하고 꼼꼼하게 기록해 놔 모두를 놀라게 했고, 작고 직전까지 이 프로젝트를 함께했다”고 말했다.
디지털 스캔으로 복원된 서신들에는 작가마다의 필체가 인상적이다. 그들의 작품만큼이나 개성이 다르다. 김창열의 필체는 그의 그림 속 정돈된 서예적 스타일과 전혀 다르게 어딘가 수수께끼를 숨겨 놓은 듯 자유롭고 때론 유머가 넘친다. 화풍이 달라진 1960년대와 1970~1980년대의 필체가 다른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에 비해 박서보의 필체는 힘이 넘치고 반듯해 그의 묘법 연작의 형태와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韓 미술 민간 외교관…베네치아서 'K 아방가르드' 선보이며 파란
티나 킴 美 티나킴갤러리 대표

2015년 현재 자리한 곳으로 옮긴 티나킴갤러리는 ‘Happy Together’라는 이름으로 첫 전시를 열었다. 다양한 아시아 예술가의 작품을 LA현대미술관 수석큐레이터 클라라 김과 함께 선보였다.
그가 같은 해 기획한 제56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단색화 그룹전’은 한국 현대 미술을 세계에 알리는 역사적인 대전환이 됐다. 10년 전 열린 이 전시는 지금도 미술계에서 회자된다. 한국의 미술계조차 단색화를 단순히 ‘미국 미니멀리즘의 한국적 해석’이라고 여기던 것에 큰 돌을 던졌기 때문이다. 뿌리 깊은 미적 전통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근본적인 전통의 원칙을 고수한 ‘새로운 한국 예술 언어’로서의 단색화 화가들을 재조명했다.
당시 이 전시는 하종현, 박서보, 이우환 등 한국 초기 추상미술과 아방가르드 선구자들의 작품으로 꾸려졌다. 1970~1980년대 군사 정권의 엄격한 통제와 민주화 시위가 끊이지 않던 시기, 저항의 몸짓으로서 ‘액션 페인팅’의 하나이던 단색화의 맥락과 뿌리를 보여줬다. 작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화가들의 ‘행위’에 주목한 큐레이션을 선보이자 파장은 컸다. 세계 주요 미술관과 학계는 한국의 단색화에 눈을 떴다. 뉴욕현대미술관(MoMA), 시카고미술관, 허시혼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등이 단색화를 대거 소장하기 시작했고, 이들을 집중하는 전시회도 이때부터 미국 유럽 아시아 등 대륙을 건너 봇물 터지듯 열리기 시작했다.
아시아 예술가와 아시아 이주민 작가들의 플랫폼으로서 역할을 해온 티나 킴은 이제 미술사에 쓰여질 예술가를 발굴하고 있다. 2022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참여한 이미래 작가를 영입, 실험적인 설치 작품으로 박물관급 전시를 꾸려 뉴욕 미술계에 소개한 게 대표적이다. 티나킴갤러리의 박물관급 전시 이후 이미래 작가는 지난해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 터바인홀에 최연소 설치 작가로 서는 기록도 세웠다. 필리핀 작가 파시타 아바드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한 데에도 티나킴갤러리가 중추적 역할을 했다.
<한국 현대미술의 형성: 김창열, 김환기, 이우환, 박서보의 편지, 1961-1982> 책을 출간하고 동명의 전시(5월 5일~6월 21일)를 함께 기획한 것은 그 연장선상이다. 전속 작가의 그림을 사고파는 상업 화랑의 보법에서 벗어나 박물관과 미술관에 작가들을 연결하는 교두보로 향하겠다는 야심 찬 선언인 셈이다.
뉴욕=김보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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