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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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통령이 아니면, 당신들은 끝장이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재선에 성공한 뒤 플로리다주 마러라고에서 열린 석유 업계 경영진 모임에서 이같은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석유·가스 산업을 부흥시켜 미국의 에너지 패권을 되찾겠다고 공언했지만, 실제로 트럼프 집권 이후 미국 내 시추, 수압 파쇄(fracking·프래킹), 장비 업체들이 잇달아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신재생에너지 사업까지 대폭 축소되면서 미국 에너지 산업 전반이 혼란에 빠졌다는 분석이다.

◇ 트럼프 정책 부메랑…줄도산 위기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기간 자신을 ‘친(親) 석유 대통령’으로 내세우며 화석연료를 배척하는 민주당과 다르다고 강조해 왔다. 재집권 이후 “드릴, 베이비, 드릴(Drill, baby, drill)”을 외치며 환경 규제를 철폐하고, 각종 인허가 절차를 간소화했다. 그러나 그가 일으킨 무역전쟁이 글로벌 석유 수요를 위축시키면서 결과적으로 역풍을 맞게 됐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석유 업계는 사상 최고 수준의 생산량을 기록했지만, 지금 많은 기업이 적자를 우려해 신규 유정 개발을 보류하고 있다”고 전했다.
무색해진 "드릴 베이비 드릴"…관세로 장비값 폭등, 시추 꺼려
트럼프 행정부 출범 3개월 만에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배럴당 65달러 이하로 하락해 업계 손익분기점을 밑돌았다. 무역전쟁 여파로 경기 불안이 확산되며 수요가 줄었고, 철강과 시추 장비의 가격 급등은 투자를 위축시켰다. 산업컨설팅업체 케이프트라이언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 취임 전 약 6500달러(약 920만원)이었던 한 중국산 시추장비 부품 가격은 현재 1만5000달러(약 2100만원)를 넘어서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낮은 유가를 요구한 것이 석유수출국기구(OPEC) 증산 결정에 영향을 줬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 결정은 트럼프 대통령의 사우디아라비아 방문 직전에 이뤄졌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건 미국 전체 원유 생산의 약 3분의 2를 담당하는 셰일 업계다. 셰일 기업이 생산비, 운영비, 이자 비용 등을 감당하려면 유가는 최소 배럴당 63달러를 형성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 중 상당수가 중소 셰일 기업에 속해 있다. 현재 텍사스주의 시추 장비 가동 대수는 팬데믹 직후 수준으로 감소했다.

크리스 라이트 미국 에너지부 장관이 창업한 미국 2위 프래킹 전문 기업 리버티에너지도 흔들리고 있다. 라이트 장관이 행정부에 입각한 이후 이 회사의 시가총액은 절반 가까이 하락했다. 리버티에너지는 관세 충격, 지정학적 긴장, 유가 불안정 등을 주요 리스크로 꼽았다. 라이트 장관은 “단기적인 유가 등락은 시장 심리의 반영일 뿐”이라며 “우리는 정책을 바꾸고 있다”고 해명했지만, NYT는 업계 다수가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와 외교 정책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 “신재생에너지 프로젝트도 불안”

신재생에너지 산업도 직격탄을 맞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첫날 해상 풍력 발전의 신규 임대를 무기한 중단하고, 새로운 허가 절차를 보류하도록 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지난달에는 뉴욕 앞바다에서 진행 중인 45억달러(약 6조3000억원) 이상 규모의 풍력 발전소 건설 사업 ‘엠파이어 윈드’ 프로젝트가 더그 버검 내무장관 지시로 중단됐다. NYT는 “업계는 이미 승인된 프로젝트마저 언제든 중단될 수 있다는 신호로 받아 들였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데이터센터 등 인공지능(AI) 산업이 필요로 하는 전력 수급에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라이트 장관은 “현재 풍력과 태양광 기술은 미국 수요를 감당할 수 없으며 대형 배터리 저장도 비용이 과다하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2일에도 재생에너지 및 전기차(EV) 충전기와 같은 기후변화 대응 사업의 연방 자금을 내년부터 삭감하는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번 계획에는 해양 풍력 등 재생에너지 프로젝트를 포함한 내무부 산하 프로그램 예산 8000만달러(약 1120억원) 삭감도 포함돼 있다. 이 예산안은 에너지부 자금을 석유, 가스, 석탄, 핵연료, 핵원자로 및 핵심 광물 채굴 기술 등의 풍부한 공급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연구개발 분야에 재편성하겠다는 방침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로이터통신은 “기후변화 대응 정책을 근본적으로 해체하려는 의도”라고 평가했다.

임다연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