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있어 길 위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2025년 도서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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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박효진의 이상한 나라의 그림책책과 여행, 그리고 만남의 기회
프랑크푸르트 도서전부터 서울국제도서전까지
독자와 출판인의 향연, 도서전 엿보기
아침에 일어나 어제 사다 놓은 투박한 호밀빵과 버터, 신선한 토마토를 먹고 부지런히 채비한다. 명함은 두둑이 챙겼는지, 노트북의 배터리는 충분한지, 필요한 서류는 잘 넣었는지 확인한다. 한국에서 가져온 가장 편한 신발을 신고, 숙소를 나서기 전 오늘 미팅 일정을 확인한 후 부스의 위치도 잘 파악한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10월 아침 공기는 차고 축축하다. 10분여 정도 걸어서 메세(Messe) 전시장에 도착하니 부지런한 출판인들이 광장에서 삼삼오오 모여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결의를 다지는 중이다. 한 켠에서 진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다시 만 오천 보의 걸음을 시작한다.
도서전은 출판인들에게 일종의 올림픽과 같다. 전 세계에서 모인 출판사들이 신작을 선보이고, 계약을 따내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하지만 그 속에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열정과 설렘이 가득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서전 중의 하나인 볼로냐 아동도서전이 곧 개최된다. 볼로냐는 이탈리아 북부 내륙에 있는 도시이며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1963년부터 개최되어 올해 62회를 맞이했으며, 모든 그림책 작가들의 염원인 볼로냐 라가치상이 수여된다. 볼로냐 도서전이 다가오면 출판인들은 설렘과 긴장이 공존하는 마음을 안고 분주한 나날을 보낸다. 신간을 선보일 카탈로그를 다듬고, 판권 계약을 위한 미팅 일정을 촘촘히 정리하며, 부스를 꾸미는 작은 디테일까지 신경 쓴다. 오랫동안 쓰고 그린 나의 작품을 알리기 위해 배낭을 짊어지고 볼로냐로 떠날 채비를 하는 신인 작가들, 좋은 작품을 선점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출판 에이전시까지 어떻게 하면 이 그림책을 잘 소개할지 고민하며 잠 못 이루는 날들이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그림책을 세계로 알리려는 출판인들, 작가들의 열정이 가득한 이 시간. 피곤하지만 설레는 순간들이 쌓여, 마침내 도서전의 문이 열리는 날, 그들의 축제는 시작된다.
2024년 서울국제도서전에는 출판 협회 추산 15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그중에서도 10~20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부스 준비를 마친 후, 잠시 커피 한 잔으로 숨을 돌리기 위해 입구에 나가보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선 줄이 장관을 이루었다.
출판인들에 버금가는 설렘을 안고 입장하여 총기 있는 눈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세심히 관람하고 깊이 생각하는 모습의 젊은 세대들이 많이 보였다. 출판인들이 밤을 새워 준비한 멋진 책들을 보며 현장에서 묻고 답하는 열띤 분위기로 도서전이 한층 무르익는다. 출출 판사 부스를 돌아다니며 본인의 포트폴리오를 손에 쥐고 수줍게 인사를 건네는 젊은이들도 있고, 책의 종이 질감과 디자인을 꼼꼼히 살펴보며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 내려가는 학생들도 눈에 띈다.
미디어에 익숙하고 짧고, 자극적인 매체의 홍수 속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다시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는 북(Book), 텍스트(Text)의 아날로그적 가치는 속도가 아닌 깊이에, 순간이 아닌 지속성에, 자극이 아닌 공감과 사색에 있었다. 짧은 3~4일의 도서전 기간 동안, 다양한 문화예술 분야의 지성인들이 만들어 낸 그 공간에서 여러 세대가 함께 만나 서로 묻고 답하며, 생각을 나누고 영감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여러 의미에서 도서전은 단순한 규모나 장소를 넘어, 한 사회의 복합적인 문화예술 발전을 촉진하는 ‘포럼 Forum’(로마 시대 철학자들이 주로 토론과 논쟁을 펼쳤던 장소)의 역할을 수행하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여행의 이유, ‘책’
포털 사이트나 SNS에 올라온 맛집 탐방과 꼭 한 번쯤 가봐야 한다는 명소들 역시 여행을 행복하게 만드는 리스트 중 하나다. 하지만 낯선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나는 책과 그림, 그것들을 대하는 현지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을 관찰하고 감상하는 여행의 기억은 더없이 소중하고 즐겁다. 도서전에서 처음 소개되는 신간을 누구보다 먼저 만나보는 설렘, 올해의 상을 거머쥘 작품을 미리 점쳐보는 재미, 그리고 나의 상처를 치유해 줄 인생 책과의 뜻밖의 만남까지. 여행 가방 한 편을 비워두고 낯선 언어로 된 책 한 권을 담아오는 것은 여행을 일상으로 오래도록 간직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될 것이다. 여행지에서 만난 책들은 시간이 지나 다시 펼칠 때마다 여행의 그날로 나를 데려가 줄 것이다. 내가 책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마법의 여행 공간, 도서전으로 떠나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