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행정명령이 수없이 발동되고 있다. 교역 상대국과 금융시장에서는 ‘PTSD(President Trump Stress Disorder, 대통령 트럼프 스트레스 징후)’라는 용어가 나올 정도다. 각국과 시장 참여자도 빠르게 대처하는 과정에서 종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메가트렌드도 나타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글로벌 금괴가 영국 런던 시장에서 미국 뉴욕 시장으로 이동되고 있는 것이다.
금괴의 이동 속도로만 보면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금 태환 정지 선언 이후 가장 빠른 것으로 평가된다. 세계경제 분권화와 달러화의 힘을 빼기 위해 금 보유를 크게 늘려온 중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도 뒤따라올지 최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중상주의 상징인 런던 금시장의 부침은 영연방과 깊은 연관이 있다. 영연방의 태동은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세계경제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갈 조짐을 보이자 옛 영화를 부활하기 위해 ‘하나의 유럽 구상’이 나왔지만, 출발부터 시련이 닥쳤다. 선민의식을 갖고 있는 영국과 이를 반대하는 대륙 간 역사적 앙금이 재발했기 때문이다.
독일의 제1차 세계대전 책임과 미국 경제의 대공황으로 해가 지지 않는 대영 제국의 영화를 되찾는 분위기가 성숙되면서 1931년 영연방이 태동했다. 다른 지역 블록과 달리 느슨한 형태의 영연방은 현재 참가국 52개국, 인구 25억 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 지역협의체다. 주요 20개국(G20)과 비슷하게 운용된다.
영연방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잠시 전성기를 누리다 미국 주도의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뒷전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가장 빨리 쇠퇴한 곳은 경제 분야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과 국제통화기금(IMF)을 양대 축으로 한 세계경제 질서가 정착되면서 영연방 국가의 탈퇴 조짐까지 일기 시작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영국은 1973년 뒤늦게 유럽연합(EU)에 가입했다.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구체화되지 못했던 하나의 유럽 구상은 1957년 로마 조약을 기점으로 EU가 재출범한 이후 순조롭게 성장했다. 반면 미국 주도의 브레턴우즈 체제는 1972년 닉슨의 금 태환 정지 선언으로 흔들려 영국으로서는 EU가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출범 이후 EU는 두 갈래 길로 추진돼왔다. 하나는 회원국 수를 늘리는 ‘확대’ 단계로 초기 7개국에서 28개국으로 늘어났다가 영국의 탈퇴로 27개국으로 줄어들었다. 다른 하나는 회원국 간 관계를 끌어올리는 ‘심화’ 단계로 유로화로 상징되는 유럽경제통합(EEU)에 이어 유럽정치통합(EPU), 유럽사회통합(ESU)까지 달성한다는 원대한 구상이었다.
문제는 영국의 EU 가입 당시 독일이 주도했다는 점이다. EU 가입을 ‘굴욕이다’라는 자국 국민의 비판과 일부 영연방 국가의 반기로 영국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영국 국민의 자존심인 파운드화 주권을 포기하는 유로화 구상에는 처음부터 참가하지 않은 데 이어 2016년에는 아예 EU를 떠났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의 시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경기침체 국면이 장기간 지속되고 있다. 영국 재무부에 따르면, 브렉시트로 자국 경제가 2030년까지 6% 위축될 수 있다고 추정된다. 국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영국 국내총생산(GDP)이 EU에 잔류했을 때와 비교해 2030년에는 5% 위축될 것으로 내다봤다.
국제금융 양대 중심지였던 런던이 대륙의 변방 금융지로 추락하고 있다. 브렉시트 이후 주식시장은 프랑스 파리와 베네룩스 3국으로, 채권시장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빠르게 이동하는 추세다. 런던 금융시장이 위축될수록 뉴욕 금융시장의 위상은 더 높아지고 있다. 트럼프 당선 이후 런던에서 뉴욕으로 금괴 대이동도 같은 선상에서 나오는 메가트렌드다.
최근 뉴욕상품거래소(COMEX)에 보관된 금괴 재고량은 3000만 트라이온스에 달한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지난해 11월 초 이후 3개월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무려 1220만 온스가 들어왔다. 개인 금 보유분까지 포함하면 뉴욕 시장에 쌓인 금괴는 사상 최대 규모인 것으로 추정된다.
글로벌 금괴 대이동의 직격탄을 맞은 런던 시장은 심한 금 부족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영란은행(BOE)에 보관된 금을 찾을 때 일주일 걸리던 것이 지금은 최대 두 달이 걸릴 정도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유럽중앙은행(ECB)과 함께 세계 3대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에서 좀처럼 볼 수 없던 마진콜(증거금 부족) 현상이다.
무려 50년 만에 글로벌 금괴 대이동이 나타난 것은 금 현물과 선물 간 가격 차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직접적 원인이다. 국제 금시장에서 런던은 현물거래가 중심인 반면, 뉴욕은 선물거래가 많이 이뤄진다. 올해 1월 20일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뉴욕 금 선물 시세가 런던 현물 시세보다 하루 평균 1.5% 정도 높은 컨탱고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런던과 뉴욕 시장 간 차익거래(arbitrage)가 나타나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 때문이다. 지난해 대선 기간부터 모든 수입품에 대해 10∼20%의 보편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공약에 대비해 금괴를 미리 미국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가격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뉴욕 시장에 금괴가 쌓일수록 금본위제로의 화폐개혁 논의가 고개를 들고 있는 점이다. 금본위제 부활은 달러 기축통화국인 미국 공화당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위기 타개책으로 제시해온 단골 메뉴다. 달러 가치가 금과의 태환이 보장된 브레턴우즈 시대가 공화당의 전통인 ‘강한 미국(Strong America)’이 가장 잘 유지됐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72년 금 태환 정지, 1976년 킹스턴 회담 같은 위기에도 잘 버텨온 달러 중심의 미국 질서가 처음으로 크게 흔들릴 때가 2차 오일쇼크 이후다. 사상 초유의 스태그플레이션에 직면한 Fed는 물가만을 잡기 위해 금리를 대폭 올리자 일본 엔화를 중심으로 ‘강한 달러-약한 아시아 통화’ 구도가 형성됐다.
예기치 못한 강달러로 대일 무역적자가 용인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자 재정적자마저 확대되면서 디폴트 우려가 불거졌다. 당시 크게 당황한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금본위제를 부활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결국은 선진국 간 엔화 대비 달러 약세를 유도하기 위한 ‘플라자 합의’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달러 중심의 미국 질서가 또 한 차례 균열을 보이게 된 계기를 제공한 것은 1995년 4월에 맺었던 역(逆)플라자 합의다. 추세적으로 최근까지 지속되고 있는 이 합의로 ‘강한 달러-약한 아시아 통화’ 구도가 재현되면서 반사이익을 누린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는 무역수지 흑자가 대폭 확대됐다.
국민 경제 3면 등가 법칙(X-M=S-I, X: 수출, M: 수입, S: 저축, I: 투자)에 따라 아시아 국가의 과잉 저축분은 미국 자산시장으로 흘러 들어간다. 거품 붕괴 모형에 따라 자산 거품을 떠받치는 돈이 더 이상 공급되지 않으면 터진다. 결국 리먼 브러더스 사태가 발생하면서 달러 중심의 미국 질서는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극단적 비관론까지 나왔다.
금융위기 이후 처음 치러진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미트 롬니 공화당 후보는 흔들리는 달러 중심의 미국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금본위제 부활을 공론화했다. 당시 롬니 후보에게 힘을 실어준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 이후 국정 목표인 ‘마가(MAGA)’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금본위제 부활을 포함한 화폐개혁이 필요하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오는 주장이다.
금본위제 부활 논의는 그 자체만으로 외화 보유, 재테크 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각국 중앙은행이 금본위제 부활에 대비해 금 확보에 나서면 금값이 크게 오를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금본위제 부활 논의가 가장 활발했던 2011년 한국은행은 외화 보유 다변화 차원에서 금을 96톤이나 사들이기도 했다.
금본위제가 부활하기 위한 가장 큰 전제조건은 충분한 금을 확보하는 것이다. 50년 만에 재현되고 있는 글로벌 금괴 대이동으로 뉴욕에 쌓이는 것을 액면 그대로 볼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들어 부쩍 논의 중인 영국의 EU 재가입을 비롯해 상전벽화 같은 대변혁(sea change)을 몰고 올 수 있는 뉴노멀 현상이라 예의 주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