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국회 목욕탕의 TV채널 싸움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맨몸 내놓고 만나던 과거 정치
동등한 조건이 협상 이끌어
한국에도 '목욕탕 정치' 있었지만
이제는 TV 채널 놓고 싸움만
'물밑 협상' 사라지니 협의도 실종
여야 모두 '탕의 미덕' 기억하길
정소람 정치부 차장
동등한 조건이 협상 이끌어
한국에도 '목욕탕 정치' 있었지만
이제는 TV 채널 놓고 싸움만
'물밑 협상' 사라지니 협의도 실종
여야 모두 '탕의 미덕' 기억하길
정소람 정치부 차장
![[토요칼럼] 국회 목욕탕의 TV채널 싸움](http://img.toplightsale.com/photo/202503/07.23617464.1.jpg)
우리나라에도 한때는 그런 ‘목욕탕 정치’가 있었다. 국회의원회관 지하 2층에는 의원만 입장 가능한 목욕탕이 있다. 하루 일과를 탕 속에서 시작하는 의원도 꽤 있다. “국회의원은 당(黨)은 달라도 탕(湯)은 같이 쓴다. 그래서 여야 의원이 탕 속에 들어가 있으면 ‘한 탕 속’이 되는 것이다.” 2004년 이계진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자신의 블로그에 적은 말이다. 한 여당 원로 정치인도 최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십수 년 전 국회 목욕탕의 추억을 털어놨다. 그는 “여야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난타전을 벌이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탕에서만큼은 친구였다”고 했다. 당시 함께하던 야당 정치인의 이름을 일일이 읊으며 잠시 추억에 잠기는 듯했다. “그때는 그래도 낭만이 있었지”라는 말과 함께.
![[토요칼럼] 국회 목욕탕의 TV채널 싸움](http://img.toplightsale.com/photo/202503/AA.39817039.1.jpg)
지난해 말 비상계엄 사태 이후 펼쳐진 정치권의 극한 대치는 그나마 숨통을 터주던 공간조차 전장(戰場)으로 바꿔놓았다. 지난 11일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원내대책회의에서 일부 방송국의 편향성을 지적하며 목욕탕 사례를 들었다. 그는 “국회에 의원들 목욕탕이 있는데, 과거엔 여야가 선호하는 방송이 차이가 있기 때문에 YTN이나 연합뉴스TV를 틀어놓는 것을 묵시적 관행으로 삼았다. 그런데 요즘은 가보면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많아서 그런지 맨날 MBC만 틀어놓는다. 오늘 아침에도 MBC를 연합뉴스TV로 바꿔놨다”고 토로했다. 그러자 이광희 민주당 의원은 곧바로 페이스북에 권 원내대표를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국회의원 목욕탕에서 일찍 오는 의원 중 하나라서 맨날 MBC 틀어놓은 사람이 바로 접니다. 누군지 다 알고 있으면서 이런 식으로 뒤에서 이야기하는 찌질함이라니”라고.
이렇다 보니 ‘물밑 대화’는 사라지고 전면전만 남았다. 과거 정치권에선 중요한 회담이 잡히면 먼저 실무급에서 협상 방향을 조율한 뒤 만나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요즘은 미리 조율한 사항이 뒤집어지기 일쑤고, 대부분의 협상 및 결렬 과정은 실시간 중계된다. 최근 추가경정예산 등 민생 현안 해결을 위해 개최한 세 차례 여야 국정협의회도 사실상 빈손으로 끝났다. 양당 모두 회의 직후 ‘백브리핑’(비공식 브리핑)을 통해 상대 당의 잘못이라며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다. 한 여당 중진 의원은 “예전에는 당 대표끼리는 싸우더라도, 원내 지도부 간엔 과도한 비난을 자제하고 뒤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했다”며 “갈수록 대화는 줄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고위급끼리 만나 모든 걸 한 번에 해결하려고 하니 평행선만 달리지 않겠느냐”고 했다. 정치인 간 텔레그램 대화나 고위급의 비공개 논의가 대부분 생중계되는 상황에서 ‘물밑 협상’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리가 정치에 바라는 ‘투명성’이 이런 종류는 아닐 것이다. 국민 대다수는 정치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라도 싸움을 멈추고 갈등을 풀어내는 역할을 해주기 바랄 것이다. 적어도 의원들이 목욕탕 내 TV 채널을 두고 설전하는 모습을 보려고 투표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물밑에서 각자의 이해관계를 눈감아주라는 얘기가 아니다. 서로 생채기를 내는 것만이 지상 과제가 된 요즘 정치권이지만, ‘목욕탕의 미덕’을 한번쯤 떠올려봤으면 한다. 긴장을 풀고 나누는 가벼운 대화가 꼬일 대로 꼬여버린 정치의 실타래를 푸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