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은 꽃말은 부귀영화이지만, 작가의 기억 속 모란은 넉넉함과 거리가 멀다. 촌지를 내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형편에서 자란 소년이 있었다. 교실 대신 길바닥에서 시간을 보내던 5월의 어느날 활짝 핀 모란이 눈에 들어왔다. 그 꽃봉오리가 어찌나 탐스러워 보였을까. 일평생 캔버스 수백점에 모란을 피운 고(故) 정의부 화백(1940~2022) 얘기다.
정의부, '화합(모란)'(2011) /노화랑 제공
정의부, '화합(모란)'(2011) /노화랑 제공
정 화백의 작고 3주기를 기념한 회고전이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서 열렸다. 1970~2010년대 작가가 그린 모란 작품 19점과 풍경화 3점이 나와 있다. 단색화와 앵포르멜, 민중예술 등 숱한 미술사조가 뜨고 지던 시절부터 우직하게 걸어온 사생화 외길 인생을 돌아본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아들인 정서호씨의 협업으로 기획됐다. 30여년 차 산부인과 전문의인 정씨는 얼마 전 홍대 회화과에 입학한 늦깎이 미술학도다. "도봉산 설경을 그리러 나선 선친을 여덟살 때 따라간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힘든 작업을 왜 하시는지 이해되지 않았죠. 환갑을 앞둔 제가 붓을 집어 든 걸 보니, 역시 아버지의 DNA가 남아있나 봅니다."
정의부, '흰 모란의 군림'(2010) /노화랑 제공
정의부, '흰 모란의 군림'(2010) /노화랑 제공
1940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정 화백은 홍대 대학원에서 서양화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개인전을 20여회 가졌다. 고등학교 교편을 잡으며 중·고등학교 미술 교과서를 편찬한 교육자였다. 한국미술대전 심사위원회 운영위원장을 지내고, 박서보·하종현 등 미술인들과 두루 지낸 마당발이기도 했다.

모란 시리즈는 생전 작가가 남긴 작품 3000여점 중에서도 대표작으로 꼽힌다. 작가의 석사 논문 주제였던 고갱을 빼닮은 중후한 선과 선명한 색조가 특징이다. 작가가 동경했다고 알려진 운창 임직순 선생의 화풍과도 맞닿아 있다. 꽃과 동네 주민 등 시골 전경을 정감 어린 색채로 묘사한 점에서다.
정의부, '청화백자와 흰모란'(2016) /노화랑 제공
정의부, '청화백자와 흰모란'(2016) /노화랑 제공
모란의 형태는 제작 시기마다 다르다. 전시장에는 영글기 전 꽃봉오리부터 청화백자에 꽂힌 모란, 산그늘에 핀 듯 어두운 모란 덩굴까지 다양하게 나와 있다. 노세환 노화랑 대표는 "초기 시리즈가 생기있는 모란을 주로 다루면서 화사함을 강조했다면, 후기작으로 갈수록 꽃잎이 늘어지거나 떨어지는 등 변주가 눈에 띈다"고 설명했다.

사생화를 추구한 작가는 직접 발로 뛰며 현장을 찾았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1980년대부터 캔버스를 싸 들고 남태평양과 미주, 유럽 등을 유랑했다. 국내에 머물 때도 주말마다 아들 정씨와 함께 답사에 나서곤 했다. 정씨는 "아파트를 분양받고자 모아둔 돈을 홀딱 들고 떠나시기도 했다"며 웃었다. 전시에 걸린 3점의 풍경화는 통영과 울릉도, 제주도를 담고 있다.
정의부, '서목(瑞木)'(1996) /노화랑 제공
정의부, '서목(瑞木)'(1996) /노화랑 제공
'철새들의 무도회'(2021) 등 작가의 만년작엔 유독 철새 떼가 자주 등장한다. 코로나19로 여행이 쉽지 않던 시기였다. 말년의 작가는 훌쩍 날아 떠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모란에 집중한 전시인 만큼 철새 연작이 걸리지 않은 점이 흠이라면 흠이다. 전시는 4월 9일까지.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서 열린 '정의부展' 전시 전경. /노화랑 제공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서 열린 '정의부展' 전시 전경. /노화랑 제공
고 정의부 작가의 아들인 정서호씨가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서 정 작가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안시욱 기자
고 정의부 작가의 아들인 정서호씨가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서 정 작가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안시욱 기자
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