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한 프랑스 피아니스트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4월 내한 공연에서 협연
“여러 지역 넘나드는 생상스 음악은 배 타고 유람하는 기분”
공상과학 소설과 과학 서적 읽으며 아이디어 얻어
“영감을 주는 피아니스트는 플레트네프...폭 넓은 표현 배운다”
'리스트의 환생', '피아노의 젊은 황제'. 2019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이자 이 대회 역대 네 번째 그랑프리 수상자인 1997년생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캉토로프에게 붙는 수식어다. 섬세한 음색으로 피아노의 서정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그가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와 오는 4월 내한한다.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캉토로프. / ⓒ Sasha Gusov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ONF)는 단원의 개성과 음악적 해석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특별해요. 각 연주자가 자신만의 음악적 색채와 아이디어를 더해 전체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내니 ONF 공연은 항상 생동감과 예상치 못한 감정으로 가득해요.”
알렉상드르 캉토로프는 <아르떼>와 진행한 서면 인터뷰에서 “다시 한번 ONF와 함께 무대에 설 수 있어 매우 기쁘다”며 이같이 말했다. ONF는 캉토로프와 단원들이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오케스트라로 뽑기에 부족함이 없다. 프랑스 파리에서 살고 있는 캉토로프는 같은 도시에 거점을 둔 ONF의 단원들과 그간 연주할 기회가 많았다. “기존 단원들을 개별적으로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최근 합류한 단원들도 상당수가 같은 음악원에서 함께 공부한 친구”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번 내한 공연이 캉토로프가 자신의 진면목을 맘껏 드러낼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지는 이유다.
차이콥스키 우승자가 말하는 콩쿠르는 “양날의 검”
캉토로프를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 놓은 건 2019년 차이콥스키 콩쿠르다. 연주자 대부분이 러시아 레퍼토리를 고르는 이 대회에서 그는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정상에 올랐다. 캉토로프는 이 모스크바 대회를 “일종의 성년식이었다”고 묘사한다. 그는 러시아 출신 스승들에게 피아노를 배우면서 이 도시에서 연주되는 음악을 동경해왔다. 캉토로프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연주했던 전설적인 연주자들의 영상을 유튜브로 보면서 그 역사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꿔왔다”며 “선생님들이 이야기해왔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명소, 그들이 사랑했던 작가, 도시 전체에 울려퍼지는 교회 종소리와 같은 분위기를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캉토로프. / ⓒ Sasha Gusov
유년 시절의 꿈을 이루자 캉토로프는 덜컥 어른이 돼버렸다. 콩쿠르 우승을 계기로 여러 일정을 소화하면서 경력이 획기적으로 달라졌을 뿐 아니라 음악에 대한 책임감도 커졌기 때문이다. 그는 “우승 직후엔 이 대회의 명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다보니 그 무게가 상당히 무거웠다”며 “지금은 그런 평판을 쌓는 요소들과 거리를 두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거리를 두지 않으면 감정적으로 불안정해져서 하루는 천재처럼 느끼다가도 다음 날은 형편없는 피아니스트처럼 느껴지는 감정적 혼란을 겪을 수 있어요. 무대에서는 차분하고 균형 잡힌 감정 상태를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잖아요. 우승을 계기로 무대 위에서의 자신과 자신의 미래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방법을 배우게 됐어요.”
그는 콩쿠르를 “양날의 검”으로 묘사한다. 음악에 스포츠처럼 순위가 따라다니는 자리. 연주자가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단 한 번의 연주로 평가 받는 자리. 경연장은 피아니스트에게 이전의 공연과는 다른 압박감을 준다. 그럼에도 그는 콩쿠르가 “젊은 음악가들이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가장 공정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음악에 대한 지식의 양, 인맥의 범위,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콩쿠르에 참가해 실력을 증명할 수 있다면 세계 최고 음악사와 음악가들의 눈에 들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얘기다.
콩쿠르 우승으로 이름을 알린 캉토로프는 미국에서 4년마다 열리는 ‘길모어 아티스트 상’에서 지난해 최연소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콘서트 피아니스트에게 수여되는 이 상은 발표 직전까지 수상자에게 수상 여부뿐 아니라 심사 대상 여부도 밝히지 않는다. 캉토로프에게도 이 상과 상금 30만 달러는 갑자기 굴러온 행운이었다. 그는 “길모어 아티스트 상을 받은 계기로 미국에서 공연 기회가 늘었다”며 “지금은 시상식이 있던 도시인 미국 미시간 칼라마주가 내 집처럼 편안하다”고 말했다.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캉토로프. / ⓒ Sasha Gusov천문학자 스티븐 호킹이 캉토로프에게 준 답은
캉토로프는 부모님이 모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집안에서 자랐다. 그도 어릴 때 바이올린을 시작했지만 결국엔 피아노를 골랐다. “저는 어릴 때 게을렀어요. 빨리 뭔가를 이해하고 바로 결과물을 내고 싶었는데 바이올린은 안 그랬어요. 제대로 된 소리를 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요. 하지만 피아노는 보상이 비교적 즉각적이에요. 멜로디와 화음을 바로 낼 수 있고 간단한 곡도 빨리 연주할 수 있어요. 각 음표가 피아노의 건반과 직접 연결된다는 사실도 매우 논리적이고 직관적으로 느껴져서 좋았어요.”
아버지의 공연에 자주 따라다녔던 캉토로프는 피아노로 바이올린의 비브라토(음을 떨리게 만드는 연주법)를 흉내 내거나 노래하는 것처럼 연주하려 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음악을 자신의 취향에 맞게 받아들이면서 그의 재능이 꽃피기 시작했다. 캉토로프는 “부모님 덕분에 음악을 직업이 아닌 편안한 무언가로 받아들이게 됐다”며 “이는 음악을 깊이 있게 감상하는 태도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부모님은 세세히 관리하기보단 “이 음을 이렇게 연주해 보렴”, “이 부분은 균형이 안맞는 것 같구나”와 같은 간결한 피드백으로 그를 지원했다.
캉토로프는 음악 외의 영역에선 변화를 최소화하려 한다. 여러 나라의 공연장을 돌면서 새로운 피아노로 연주해야 하는 낯선 환경에서 안정감을 지키기 위해서다. 대부분의 시간은 악보 분석에 쓴다. “평소 연주에서의 몸짓, 음표 사이의 타이밍, 전체 곡을 하나의 유기적인 흐름으로 완성하는 과정을 고민해요. 무대에 올라가면 모든 준비 과정을 제쳐두고 완전히 새로운 상태에서 시작하고 싶어서요. 이상적인 공연은 즉흥 연주와 같아요. 첫 음을 연주하는 순간부터 음악이 어디로 흘러갈지 알고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거죠. 무대에서 최고의 순간이란 생각이 너무 많지 않을 때입니다. 몸은 자연스럽게 아는 걸 수행하고 마음은 창의성과 영감을 위한 도구로 쓰이는 상태죠.”
시간이 남을 때 그는 공상과학 소설이나 과학 서적을 즐겨 읽는다. 캉토로프는 “어려서부터 명확한 정의와 뚜렷한 원칙을 갖고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다”고 했다. 건반 하나에 음 하나가 연결되는 피아노의 명쾌한 논리성에 빠졌던 유넌시절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캉토로프가 과학과 음악 사이에서 접점을 찾았던 책은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이다. 그는 “천체물리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 이론이 평생에 걸쳐 증명될 수 있을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결국 어느 정도 신념을 바탕으로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며 “이러한 태도가 음악의 신비와 맞닿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블랙홀은 인간의 직관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며 “이렇게 인간 사고의 한계를 뛰어넘는 과학적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다”고 했다.
“직관과 조화를 이루는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수많은 피아니스트들 중 캉토로프의 ‘최애’ 연주자는 누구일까. 그는 “평생에 걸칠 정도로 깊게 좋아한 피아니스트는 한 명도 없었다”고 선을 그었다. 다만 배울 점이 많은 대가로는 1978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인 미하일 플레트네프를 꼽았다. 캉토로프는 “그는 피아노로 표현할 수 있는 색과 소리의 폭이 가장 넓은 연주자”라며 “플레트네프는 장인이 조각하거나 화가가 붓질하는 것처럼 음악에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듯한 느낌을 낸다”고 말했다. “음표 사이의 타이밍과 색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플레트네프가 드러내는 유연함과 자유로운 발상들이 항상 영감을 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캉토로프. / ⓒ Sasha Gusov
4월 내한 공연에선 생상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이집트’와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등을 연주한다. 두 연주자 모두 평소 캉토로프가 즐겨 연주하던 이들이다. “피아노 협주곡 5번 2악장에서 여행자인 생상스는 여러 지역의 음악 전통을 넘나들어요. 마지막엔 마치 배를 타고 돌아오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해내요. 그것도 연주시간 단 8분 만에 말이죠. 피아노로 심발룸(2개의 막대기로 두드려 연주하는 고정식 현악기)과 비슷한 분위기를 내거나 인도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징을 쓰는 등 창의성도 잘 드러내요.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는 변주곡이 진행되면서 원곡의 주제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들리지만 작품 전체에 흐르는 긴장감과 흐름은 유지돼요. 점진적으로 쌓여가는 극적인 전개감이 이 곡을 매력적으로 만듭니다.”
앞으로의 목표를 묻는 질문엔 “명확한 목표가 없는 게 음악과 이 직업 세계의 아름다움”이라는 답을 내놨다. 캉토로프는 “노래를 연습할 때 곡을 끝낸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인생의 목표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 같다”면서도 “목표를 굳이 둔다면 자신의 직관과 조화를 이루는 여정이 목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직관은 우리를 예상치 못한 곳으로 인도하는 훌륭한 안내자”라며 “직관을 따르는 여정에서 그간의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40대에 지휘자가 된 아버지의 길을 뒤따를 가능성에 대해선 잘라 말했다. “지휘는 음악적인 면뿐 아니라 인간관계 면에서도 매우 까다로운 역할이잖아요. 80여명의 단원들에게 연주법을 가르치는 건 엄청난 책임이 따를 텐데 제가 그 부담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될지는 지켜봐야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