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극장에 도착해 객석으로 들어가는 순간 오케스트라의 조율음이 가장 먼저 우리를 반긴다. 오보에의 A(라) 음(440Hz)에 맞춰 현란하게 조율 중인 악기들의 제각각인 소리는 막이 올라가기 전 우리의 심장 고동을 울리는 소리이며,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공연 관람 시 주의 사항 안내가 끝나고 암전이 되면, 음악감독이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일어서 관객에게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극이 시작되면 우리는 화려한 무대에 시선을 빼앗긴 채 보이지 않는 오케스트라는 잊어버리게 되고, 음악은 연주보다는 배우들의 노래를 통해 인식된다.

참 신기한 일이다. 영미 뮤지컬의 형성기 속 전신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오페레타, 더 나아가 오페라에서 오케스트라는 극의 핵심으로서 자리 잡고 있었다. 현재에도 그러하지만, 과거 오페라에서 가장 입김이 강한 사람은 작곡가이자 지휘자였고, 관객은 오케스트라 존재의 중요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뮤지컬에서 오케스트라의 존재는 극이 시작되면 잊혔다가, 커튼콜에서야 관객들의 인지 범주에 다시 등장하게 되는 걸까?
[좌] 오페라 극장   [우] 뮤지컬 극장 / 사진. © 김소정
[좌] 오페라 극장 [우] 뮤지컬 극장 / 사진. © 김소정
뮤지컬 극장에서 오케스트라 피트가 오페라 극장에서와 달리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의 시선 '밖'에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페라 극장의 경우 무대와 객석 사이에 오케스트라 피트를 배치한다. 반면 뮤지컬 전문 극장은 객석과 무대의 거리를 최소화하기 위해 오케스트라 피트를 무대 밑에 배치하거나 무대 뒤로 옮긴다. 뮤지컬 시작 전 지휘자의 인사를 제외하고, 뮤지컬이 무대 위에 펼쳐지는 동안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그 존재를 숨기며 관객은 오로지 무대 위 구현되는 것들에만 집중하게 된다. 대극장 뮤지컬이 아닌 중소극장 뮤지컬의 경우 재정·물리적 이유로 별도의 라이브 오케스트라 없이 녹음된 음원(MR)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더불어 뮤지컬에서는 마이크가 사용되기 때문에, 관객에게 들리는 음악은 일차적으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사운드 디자인된 결과물로서 전달된다.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는 오페라에서 가수의 노래와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자연적 공명을 이루며, 음악이 자신의 존재감을 분명하게 독자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 많은 것과 다르다. 뮤지컬 오케스트라의 소리는 물리적인 공간보다 음향 시스템에 의존하게 되며, 관객은 자연스럽게 음악 위에 핀 마이크를 통해 전달되는 배우의 노래에 집중하게 된다. 뮤지컬에서 기악은 장면 전환이 진행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독자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길게 드러내는 경우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ChatGPT로 제작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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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오케스트라는 이처럼 관객에게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묵묵히 극장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뮤지컬 오케스트라는 오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분명 중요하다. 오페라에서 오케스트라가 선율, 화성, 리듬 등을 통해 인물의 심리와 정서를 음악적으로 표현한다면, 뮤지컬에서는 다양한 음악 장르를 사용하며, 각기 다른 음악 장르는 인물의 말투가 되어 그 사람의 성격, (문화적) 정체성 등으로 분한다. 즉, 뮤지컬은 '어떤 음악이 쓰였는가'를 통해 인물을 말하고, 오페라에서는 '어떻게 쓰였는가'로 인물을 표현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는 뮤지컬의 황금기를 연 작품이라 평가받는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dgers)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Oscar Hammerstein Ⅱ)의 뮤지컬 <오클라호마! Oklahoma!>(1943)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포크 음악, 컨트리, 래그타임 등을 사용해 오클라호마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토착적 정서와 공동체 의식, 그리고 개척 정신을 음악적으로 강조했고, 뮤지컬은 '통합(integration)'의 성격을 띠는 장르로 발돋움했다.

이후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은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West Side Story>(1957)에서 유럽계 이민자와 푸에르토리코 이민자에게 각각 블루스, 플라멩코와 같이 구분되는 음악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음악을 통해 인물의 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냈다. 스티븐 손드하임(Stephen Sondheim)은 뮤지컬 <스위니 토드 Sweeny Todd>(1979)에서 음악을 통한 서브 텍스트(sub-text) 사용을 시도하며 가사와 음악 간의 불일치, 불협화음을 통한 심리의 음형 등을 구현했다. 이후 사회에 대한 반항의 심리를 구현하는 데 있어 록(rock)이 사용되었으며, 인종과 젠더에 대한 담론과 함께 힙합과 랩이 적극적으로 뮤지컬 안에 유입되었다.

뮤지컬에서는 다양한 음악 장르뿐 아니라, 음악의 형식과 구조 또한 중요하다.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는 아이 엠 송(I am song),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는 아이 원트 송(I want song)이 극의 중심이 되며, 라이트모티프(Leitmotiv)와 리프라이즈(reprise)의 배치에 따라 뮤지컬은 음악의 드라마를 더욱 탄탄하게 완성한다. 주요 인물을 중심으로 부여된 라이트모티프와 넘버의 리프라이즈는 인물의 변화 과정과 플롯 전개 발전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가령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는 장 발장의 라이트모티프라 할 수 있는 넘버 'Look Down'과 'Who am I'의 멜로디를 통해 죄수에서 시장, 성인(聖人)으로 변해가는 장 발장의 정체성 변화와 자신을 찾아가는 그의 모습을 음악적으로 보여준다.

[레 미제라블 - Look Down]

[레 미제라블 - Who Am I]
뮤지컬 <시라노>에서는 드 기슈 백작이 시라노에게 『돈키호테』의 13장을 말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 시라노와 그가 이끄는 가스콘 부대에게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돌진할 때 부르는 넘버 '라만차의 기사' 멜로디를 인용한다. 이것은 계속해서 리프라이즈되며, 사회적 특정 계층에 의해 형성된 부당함과 같은 세상의 거인들과 싸우는 시라노의 모습을 부각한다.

즉, 뮤지컬 오케스트라는 테크닉을 중심으로 어떻게 아름다운 연주를 할 것인가에 방점을 두는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그 목적을 달리한다. 인물의 라이트모티프와 리프라이즈와 같은 음악의 언어가 어떻게 극의 전체 구조 안에서 관객들에게 직관적으로 전달될 수 있게 연주할 것인지 등과 같이 음악 자체보다는 일종의 '서사성으로의 음악'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다면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전혀 다른 인상을 받을 수 있으며, 관객이 언어로서의 음악을 포착하기 힘들어진다. 그러나 여전히 성악과 기악을 독립적이면서도 총체적으로 듣는 훈련이 되어 있는 관객이 아닌 경우 오케스트라의 음악은 성악에 가려지기 일쑤이다. 물론 이는 오페라보다 훨씬 극적인 성격이 강한 뮤지컬의 속성 때문이기도, 인간의 감각적 본능에 의해서 어쩔 수 없기도 한 것이다.

인간은 정보의 대부분을 시각에 의지하는 만큼, 인간의 뇌는 시각 처리에 상당 부분의 감각 처리 영역을 할당한다. 그렇기에 어떠한 감각보다 앞서 시각이 우선 처리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은 보는 것을 통해 무언가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데 익숙하다. 한편, 청각은 시각처럼 즉각적이고 전체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만큼, 흐르는 음악은 순간순간 집중력을 발휘해 매 순간을 인위적으로 잡아야 하는, 상당히 피곤한 존재가 된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라는 말처럼 조명, 무대배경 및 전환, 배우 등과 같은 수많은 시각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결부된 무대 위에서, 청각 정보는 인지 차원에서 멀어나게 되며, 시야에 존재하지 않는 오케스트라는 주요 정보로 간주되지 않으면서 자연스레 잊히게 된다.
김문정 지휘 모습 / 사진출처. ⓒThe P.I.T.
김문정 지휘 모습 / 사진출처. ⓒThe P.I.T.

뮤지컬 오케스트라는 그럼 망각될 수 밖에 없으며, 그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브레히트 이후 강조되기 시작한 관객의 능동성 논의의 흐름 속 ‘이머시브(immersive) 뮤지컬’이라는 새로운 형태가 구축된 것처럼, 관객의 능동성은 뮤지컬 오케스트라의 존재 위치를 재정의하는 데도 중요한 요소로 작동할 수 있다. 독일 철학자 칸트를 시작으로 점차 음악에 있어 청중의 감정 이입이 아닌 인식 작용과 판단 능력이 강조됐다. 즉 음악을 통해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연주자가 일방적으로 청중에게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이 구조적 형식에서 감정과 감동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전환은 뮤지컬 오케스트라를 향한 우리의 청취 태도에도 시사점을 준다.

관객이 음악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읽어낸다면, 시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 이외 은밀하게 드러나는 은유적인 의미의 발현을 바탕으로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더 입체적이고 풍부하게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감각으로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뮤지컬 <시카고>, <넥스트 투 노멀> 등 무대 위에 오케스트라가 배치되어, 시각적으로 관객에게 노출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사실상 조명과 시선은 무대 위 배우에게 집중된다. 연주자가 특정 장면에서 직접적으로 극에 등장하여 개입하지 않는 한, 오케스트라의 존재감은 여전히 희미하다. 사실상 중요한 것은 그들의 존재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내는 기악을 인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논의는 관객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무대 아래, 어둠 속에서 연주하는 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 뮤지컬 오케스트라 연주가는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오케스트라 연주는 사전에 극의 드라마를 파악하며, 음악감독이 지휘에 맞춰 드라마에 맞는 음악을 그려내는 데 방점을 둔다고. 거기에 대사의 흐름에 움직이는 솔로 악기들은 공연마다 배우들의 호흡에 맞춰 최대한 음악을 연주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클래식 오케스트라와 뮤지컬 오케스트라의 차이에 있어 '드라마를 연주'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오케스트라를 신데렐라에 나오는 요정 할머니에 빗대었다.

배우들의 연기와 그 감정에 색을 입혀 더욱 화려하게 만들어주는 동시에 드라마를 더욱더 살려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상황에 따라 사용되는 악기가 다른 만큼, 그 부분에 집중한다면 뮤지컬 관람 시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언급했다. 그들은 무대 위에는 없지만, 극의 한가운데에서 누구보다 뚜렷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뮤지컬 <팬텀> 공연 무대 아래, 김문정 지휘에 맞춰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모습 | KBS Entertain]

뮤지컬 무대에서 오케스트라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연주자들은 침묵 속의 연기를 하고 있었다. 다만 조명이 닿지 않았고, 우리는 그들의 연주로서의 연기를 눈이 아닌 귀로 보아야 했다. 김문정 음악감독이 자신의 에세이 『이토록 찬란한 어둠』에서 오케스트라 피트를 '찬란한 어둠'이라고 말한 것처럼, 오케스트라 피트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이 아닌, 뮤지컬이라는 예술을 지탱하는 하나의 심장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뮤지컬을 '보는 것'에서 더 나아가 '들어야' 한다.

김소정 뮤지컬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