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성장, 돌발악재 탓이라지만…
탄핵 사태·산불로 내수부진 심각
4분기 연속 0%대 성장은 처음
혁신 실종에 '회복 탄력성' 잃어
가계부채·자영업 구조조정 지연
개인 소비여력 줄고 기업 경쟁력↓
한국은행은 1분기 경제가 역성장한 것은 예상치 못한 여러 돌발 악재가 겹쳤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작년 10월 이후 세 차례에 걸친 금리 인하 효과가 나타나고 통상 및 정치 불확실성이 해소되면 올 2분기부터 성장률이 다시 플러스로 돌아설 수 있다고 기대했다.
민간 전문가들의 진단은 이런 낙관적 판단과 거리가 있다. 과도하게 누적된 가계부채와 인구 고령화 등으로 내수 불황이 장기화할 조짐이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미국과 중국 혁신 기업 사이에 끼여 고전하는 한국 기업의 수출 경쟁력도 문제점으로 지목했다. 한은 부총재 출신인 이승헌 숭실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제대로 개혁하지 못하면 장기 저성장이 고착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외환위기 때도 없었던 장기 제로 성장
이동원 한은 경제통계 2국장은 24일 1분기 한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속보치) 통계 지표 기자간담회가 시작되자 “먼저 설명드릴 부분이 있다”며 1분기 GDP 증가율(-0.2%)이 2개월 전 한은 전망치(0.2%)를 큰 폭으로 밑돈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대내외 불확실성으로 경제 심리 회복이 지연됐고 건설 경기가 예상보다 부진했으며 대형 산불과 고속도로 교량 붕괴사고 등으로 소비와 투자가 더 위축됐다고 분석했다. 엔비디아의 인공지능(AI) 가속기 발열 문제로 삼성전자의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주가 미뤄진 영향도 거론했다. 한은 고위 관계자는 “이런 악재들이 2분기부터 정상화하면 성장률에 플러스 요인이 될 것”이라며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 불확실성이 걷히고 새 정부 들어 추가경정예산 집행이 본격화하면 성장률은 올라간다고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 가계부채로 중산층 소비 여력 줄어
하지만 대다수 전문가는 이런 일시적 요인보다 구조적 문제를 주목했다. 2% 안팎으로 추정되는 잠재성장률에 비해 저성장이 너무 오랜 기간 지속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GDP 증가율은 지난해 2분기 이후 올 1분기까지 네 분기 연속으로 ‘0.1% 이하’를 기록했다.
이런 저성장 국면은 과거 대규모 경제·금융 위기 때도 경험하지 못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엔 세 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한 후 네 번째 분기(1998년 3분기)에 2% 고성장을 기록했다. 2003년 신용카드 대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19 사태 당시에도 성장률은 한두 분기 뒷걸음질한 뒤 큰 폭으로 반등했다.
이코노미스트들은 “한국 경제의 활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다”(이승훈 메리츠증권 연구원)고 입을 모았다. 고령화와 가계부채로 중산층 소비 여력이 빠른 속도로 줄고, 경쟁 심화로 자영업과 소상공인의 실질 소득도 감소하고 있어서다.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하는 한국 기업 경쟁력이 후퇴하고 있는 것도 구조적 문제점으로 여겨진다.
한은도 이런 구조적 문제를 인정하고 있다. 이 국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가계부채 증가와 고령화로 소비가 둔화하는 점을 거론하면서 “내수가 과거처럼 성장에 제대로 기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 이미 경기침체 시작됐을 가능성
이 교수는 “한국의 수출과 내수 엔진은 201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약화했다”며 “국내 부동산 버블과 코로나19 사태 등을 거치면서 빨리 알아차리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현재 상황을 경기침체 초입기로 보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기침체는 일반적으로 분기 GDP 증가율이 두 분기 또는 세 분기 연속 역성장하는 경우를 말한다”면서도 “우리나라 잠재성장률(1.8%) 수준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성장률이 장기간 이어지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이미 경기 침체가 시작됐을 가능성도 의심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