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의 회전 운동을 가능하게 해 ‘산업의 관절’로 불리는 베어링업계가 변곡점을 맞고 있다. 내연기관 차량보다 무거운 전기차 보급이 늘면서 전기차 하중을 견딜 수 있는 고성능 베어링 생산 여부가 기업 운명을 가르는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사람처럼 움직이는 휴머노이드 확산으로 베어링에 요구되는 정밀도 수준도 급격히 까다로워지는 추세다. 국내 토종 베어링 업체들은 높아진 기술 장벽을 넘기 위해 글로벌 기업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토종 업체와 글로벌 기업이 양분

1990년대까지 국내 베어링 시장은 토종 업체가 장악하고 있었다. 국내 최초의 베어링 회사인 신한베어링을 인수한 한화그룹이 베어링 국산화에 앞장섰다. 한화가 60% 지분을 보유한 한국베어링공업이 선두를 지켰고 한화와 일본 NSK 합작사인 한화NSK정밀이 뒤를 받쳤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글로벌 베어링 업체 중심으로 재편됐다. 한국베어링공업은 독일 FAG에 매각되고 한화NSK정밀은 일본 NSK에 넘어갔다. 이후 FAG는 셰플러코리아로, 일본NSK는 한국NSK로 각각 사명을 바꿨다. 외국회사 틈바구니에서 일진그룹이 포니를 시작으로 현대자동차에 베어링을 납품하면서 토종 업체 명맥을 유지했다. 2020년 이후 현대차 판매량이 급증하면서 일진도 급성장했다.

일진그룹의 2021년 베어링 매출은 2조1170억원에서 지난해 3조4900억원으로 65% 늘어났다. 세계 휠 허브 베어링 시장에서 70%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글로벌 경쟁사를 물리치고 국내 1위 베어링 업체가 됐다. 다른 토종 업체인 씨에스베어링도 북미 수출을 기반으로 회사 덩치를 키웠다. 2021년 567억원이던 매출을 3년 만에 1054억원으로 갑절로 늘렸다.

세계 1위 베어링 기업인 독일 셰플러도 한국 사업을 강화했다. 셰플러코리아의 매출은 2021년 1조1430억원에서 지난해 2조540억원으로 급증했다. 지엠비코리아(7267억원)와 삼익THK(3044억원)도 국내 베어링 시장 점유를 늘리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범용베어링 분야에선 중국 업체들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지만 고성능 베어링 시장은 아직 국내 업체와 글로벌 회사가 양분하면서 성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전기차와 로봇으로 시장 재편

전기차 판매량이 늘면서 고성능 베어링 시장은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전기차 시대가 되면 베어링 시장이 위축될 것으로 예상됐다. 내연기관 차량에 비해 전기차에 들어가는 부품이 줄어드는 만큼 베어링 수요도 감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성차 업체가 요구하는 베어링 성능이 까다로워지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전기차는 내연기관차보다 1t가량 무거워 고부가가치 고강도 베어링이 들어간다. 전기차 성능 개선도 빨라지면서 베어링 개발 주기도 짧아졌다.

휴머노이드 확산도 베어링업계의 지각변동을 가져올 요인으로 꼽힌다. 휴머노이드에 들어가는 베어링은 고도의 정밀성이 요구된다. 특히 로봇 관절(액추에이터)의 힘을 분산하고 미세 조정할 수 있는 감속기가 기술력의 핵심이다.

일진그룹 관계자는 “미국, 유럽 등에 액추에이터를 납품하고 있다”며 “액추에이터는 기존 베어링 회사가 보유한 기술로 제조할 수 있으며 얼마나 맞춤형으로 생산할 수 있느냐가 납품 여부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셰플러코리아는 레인보우로보틱스, 네이버와 함께 이동형 양팔로봇을 개발하고 있다. 또 미국 대표 휴머노이드 기업인 어질리티로보틱스와도 개발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테슬라가 휴머노이드 분야에서 앞서가는 이유가 인공지능(AI)과 하드웨어를 둘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며 “우리도 AI를 잘하는 어질리티와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발 관세전쟁도 큰 변수로 꼽힌다. 베어링은 자동차 부품으로 분류돼 25%의 기본관세가 부과된다. 향후 국가별, 품목별 관세가 결정되면 베어링 업체 간 희비가 엇갈릴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베어링 회사들은 중국과 멕시코에 생산공장을 많이 두고 있다”며 “국가별 관세가 어떻게 정해지느냐에 따라 시장 판도가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진우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