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와 재난 장르가 결합한 영화라면. 누군가는 자연재해나 팬데믹 상황에서 탄생하게 되는 한 연인의 이야기를 상상할 것이다. 다만 그러한 설정은 이미 수많은 재난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이야기적 관습이 아닌가. 영화 <바이러스>는 문자 그대로 사랑에 빠지게 하는 바이러스가 퍼지며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린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줄거리를 쓰면서도 민망할 정도로 동화적인 상상이지만 영화는 그런대로 이 오글거리는 전제를 과감하게 밀고 나간다.
영화 '바이러스'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이야기는 번역가이자 만성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택선(배두나)이 동생과 엄마의 강요로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과학자 수필(손석구)과 억지로 소개팅을 하게 되는 자리로부터 시작된다. 택선에게 관심이 없는 듯한 수필은 연구소에서 걸려 온 전화 한 통을 받고 자리를 떠나버리고, 자존심이 상한 택선은 집으로 돌아온다. 다음 날 수필은 택선의 집으로 꽃다발을 들고 찾아온다. 할 수 없이 함께 저녁을 먹게 된 택선은 그로부터 느닷없는 고백과 청혼을 받는다. 당황한 그녀는 수필을 쫓아내고 홧김에 술상에 차려진 소주와 어묵 한 조각을 먹는다.
그리고 수필이 남긴 이 어묵 한 조각. 그 작은 한 입이 택선과 전 인류의 운명을 바꿔놓는다. 우울증 치료제를 위한 바이러스를 연구하던 수필은 감염 상태였고, 그 바이러스가 택선에게 옮겨 온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감염 이틀 만에 수필이 죽게 되며 벌어진다. 그는 죽기 전 택선에게 이균 박사(김윤석)를 찾아가라는 간절한 메시지를 남긴다.
영화 '바이러스'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바이러스>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바이러스와 팬데믹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이는 사랑이라는 ‘열병’을 구체화한 메타포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 속 (로맨스를 제외한) 코미디적 설정은 대부분 바이러스로 인해 ‘아무에게나’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오는 해프닝과 소동에 기반한다.
결과적으로 무작위로 강요된 로맨스는 아무런 감동도 짜릿함도 주지 못한다. 동시에 말장난 같지만 서로의 입장 차이를 재치 있게 전달하며 대립하는 로맨틱 코미디만의 장르적 중추, 대사는 <바이러스>의 취약점이다. 로맨틱 코미디. 즉, 롬 콤(Rom-com)의 정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에서부터 <노팅 힐>(1999)을 거쳐 <브리짓 존스의 일기> 시리즈(2001~2025)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대표하는 작품들의 공통점이라면, 잠재적 연인이 나누게 되는 티격태격 대화다. 유머와 위트를 기반으로 쓰인 대화/대사를 통해 관객들은 웃음도, 애정에 대한 공감도 얻는 것이다.
영화 '바이러스'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바이러스>가 소설을 기반으로 한 프로젝트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애초부터 캐릭터의 대사와 문학적인 서술이 부족했을 것 같지는 않다는 예측이 든다. 다만, 영화화를 하는 과정에 있어 밸런스와 변주에 실패한 또 다른 예가 아닐런지. 예를 들어 팬데믹의 스케일을 넓히는 대신 (시골 동네 어르신들의 감염 해프닝은 크게 영화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심 캐릭터인 택선의 주변 인물로 감염 대상자들을 좁히고, 그녀의 반경 안에서 로맨스의 상대를 다시금 새롭게 발견한다는 것이 더 설득력을 가진 스토리가 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택선과 (현재 영화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병리학적인 대화가 아닌 얕은 듯하면서도 흥미로운 세속의 이야기를 나누며 관계를 발전시키는 로맨스였다면 공감할 수 있는 영화로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스크린에 등장한 로맨틱 코미디 <바이러스>는 그나마 잘 만든 한국형 롬 콤이라고 언급할 수 있었던 <연애 빠진 로맨스>(2021), <가장 보통의 연애>(2019) 등의 작품에서도 한참 퇴보한 듯 실망스럽다. 다만, 이 영화에 하나의 성취가 있다면, 멜로 캐릭터로서의 배우 김윤석을 재발견한 사실이다. 수줍어하는 표정과 보일 듯 마는 듯한 눈웃음이 담긴 ‘아귀’의 클로즈업을 멜로 영화가 아니라면 어디서 볼 수 있단 말인가. 한국 영화에서는 좀처럼 시도되지 않지만, 중년의 멜로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그 최적의 역할은 단연코 배우 김윤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