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이 4년 전 인수한 전기차 충전기 제조업체 SK시그넷(옛 시그넷이브이)을 매각하기로 했다. 그룹 차원에서 진행하는 리밸런싱(사업 재편) 작업의 일환이다. 경영권 매각 가격은 3000억원 안팎으로 거론된다.

사업재편 속도내는 SK, 시그넷도 판다
14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SK㈜는 SK시그넷 경영권 지분 62.9%를 팔기로 했다. 외국계 대형 IB를 매각 자문사로 선정하고, 국내 사모펀드(PEF)와 접촉해 인수 의사를 타진하고 있다.

SK시그넷은 미국 초급속 충전기 분야 점유율 1위 기업이다. 세계 시장 점유율은 2위다. SK㈜는 2021년 코넥스시장 상장사인 이 회사 지분 55.5%를 2930억원에 인수했다. 최근 제3자 배정 유상증자 방식으로 1150억원을 추가 수혈했다.

SK시그넷은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 여파로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SK시그넷은 지난해 매출 838억원을 올렸지만 영업손실이 2428억원에 달했다. 단기 부진에 신음하고 있지만 급속 충전 관련 기술력을 보유했다. 캐즘 이후 반등이 기대되는 만큼 저가 매수 기회로 보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전기차 밸류체인 연관 기업 투자를 노리는 국내 PEF, 국내외 주요 완성차 업체 및 자동차 부품 업체 등이 인수 후보로 거론된다.

인수 4년 만에 다시 매물로…SK "본전 못찾아도 판다"
전기차 밸류체인 정리 수순…SKIET 이어 넥실리스도 만지작

지금 SK시그넷을 시장에 내놓으면 제값 받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2021년 인수할 때 들인 자금과 최근 유상증자 대금까지 더하면 SK㈜는 SK시그넷에 4000억원 이상을 투입했다. 하지만 코넥스시장에서 SK시그넷 시가총액은 872억원에 불과하다.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으로 관련 기업에 대한 투자 심리가 차가워진 가운데 실적까지 고꾸라진 여파다.

그럼에도 SK그룹은 비주력 사업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핵심 사업에 집중한다는 원칙에 따라 매각을 결정했다. ‘본전’을 생각하며 리밸런싱을 망설일 때가 아니라는 게 SK그룹 내부의 확고한 기조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SK시그넷 매각은 재무 구조 개선 목적보다는 비주력 사업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진행하는 딜”이라며 “‘손해에 연연하지 않고 비주력 사업은 확실히 접겠다’는 SK그룹의 실용주의 리밸런싱 기조를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SK시그넷 인수 4년 만에 다시 시장에 내놓는 점도 주목할 만한 포인트다. 일반적으로 주요 대기업이 인수한 회사를 단시간 내에 재매각하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다. 과거 경영진의 결정을 부정하는 일인 데다 시장에서도 이를 좋지 않은 신호로 받아들이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SK그룹은 이런 시장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있다. 과거에 오판이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바로잡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판단을 우선시하고 있다. SK에코플랜트가 2020년 건설업을 넘어 친환경 플랫폼으로 전환하겠다며 인수한 리뉴어스(옛 환경시설관리)와 리뉴원(옛 대원그린에너지)의 매각 작업을 하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SK그룹이 SK시그넷 매각과 함께 그간 구축해온 2차전지 및 전기차 관련 밸류체인을 본격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SK그룹은 그룹 차원에서 내연기관 자동차 중심에서 전기차로 전환되는 시기가 도래할 때를 대비해 관련 사업을 새 먹거리로 낙점하고 밸류체인을 구축하는 데 공을 들여왔다. 2차전지 핵심 소재인 동박 사업을 하는 SK넥실리스, 분리막을 제조하는 SK아이이테크놀로지(SKIET), 배터리를 생산하는 SK온 등이 대표적인 SK그룹 2차전지 관련 계열사다.

SK그룹은 소재 개발부터 배터리 생산, 전기차 충전까지 수직 계열화를 통해 시너지를 내겠다는 구상이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전기차 캐즘이 예상보다 길어져 그룹의 신성장 동력으로 키우려던 2차전지 밸류체인 계열사가 재무적 위기만 가중시켰다. SK그룹은 지난해부터 SKIET 매각 작업에 들어갔지만 아직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SK넥실리스 매각 계획은 없다고 선을 긋고 있지만 시장에선 가격 눈높이만 맞으면 SK넥실리스 딜이 성사될 것으로 보고 있다.

박종관/차준호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