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생태계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으나 지배구조만큼은 정치의 영향을 덜 받을 것으로 추정된다. 증시 부양을 위해 정치권이 주주권리 강화 조치에 대해 큰 이견을 보이지 않고 있어서다. 밸류업을 위해선 경영 관여 전략으로 수익을 낸 미 연기금 캘퍼스에 주목해야 한다.
[한경ESG] 러닝 - ESG와 밸류업 ④
트럼프 같은 예측 불허 인물이 초강대국 수장에 오를 때 발생하는 정치적 불확실성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전망을 어렵게 만든다. 한국에서도 지난해 12월 초 이래 정치적 이유로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한계를 지닌 채 2025년 ESG 전망을 통해 밸류업 가능성을 모색했다.
ESG 리서치 회사들은 2025년 공통적으로 다음 3가지를 예측하고 있다. 첫째, 넷제로라는 목표 설정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전환 금융이 부상할 것이다. 둘째, 반(反)ESG 측과 다툼 여지를 줄이고자, 혹은 마케팅 차원에서 미국과 유럽의 ESG 펀드들이 이름에서 ESG를 뺄 가능성이 있다. 셋째, 인공지능(AI) 확산과 빅테크의 증시 독주로 인해 개인정보 보호 같은 사회 현안이 중요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 3가지를 아우르는 그린허싱(greenhusing) 키워드가 유행한다. 그린워싱(greenwashing)이 ESG를 하는 척만 하는 것이라면, 그린허싱은 안 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기존 방식과 약간 다른 형태로 실천하는 것이다. 기후변화 대응 정책에 소송까지 불사하는 미국 공화당 측 반발에서 비롯된 풍조다. 특히 금융사들이 법률 리스크를 회피하고, 고객 이탈을 우려하며 표면적으로 ESG에서 한발 물러서고 있다. 본질적으로 넷제로와 다르지 않은 전환 금융 부상과 ESG 펀드의 포장지 교체도 일종의 그린허싱으로 볼 수 있다. 트럼프 임기 4년은 이와 유사한 현상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2025년 ESG 키워드]
이러한 변동성 속에서 한국의 ESG를 영역별로 정리해보았다. 한국은 온실가스 집약도 감소 속도가 더디다. 탄소감축의 핵심인 에너지 정책과 산업계 규제를 두고 진보와 보수 진영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며, 불확실성이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환경). 저출산과 초고령화 같은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른바 혈족 경영을 강화하거나 글로벌 공급망 규제에 대비한 인권 강화 노력이 전망된다. 그러나 사회 영역 역시 여당의 입장에 따라 규제 수준이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사회). 환경, 사회와 달리 정치적 지형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영역은 지배구조다.
책임 투자의 워밍업 기간을 거쳐 본격적 이행기에 접어든 국민연금의 방향성도 비교적 명확하다. 증시 부양 기조에서 필요성이 언급되는 주주권리 강화 조치에 대해 여야의 의견이 큰 틀에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캘퍼스 효과, 주주행동주의의 긍정적 영향은
국민연금, 밸류업, 주주자본주의라는 2025년 한국 ESG의 지배구조 키워드를 연결 지으면, 캘퍼스 효과가 떠오른다. 캘퍼스 효과란 미국 최대 공적 연기금 중 하나인 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CalPERS, 캘퍼스)이 주주행동주의를 통해 목표 기업의 주가와 기업 지배구조에 미친 긍정적 영향을 뜻한다.
포트폴리오 수익률 개선을 위해 캘퍼스는 주주행동주의를 주주 관여 활동(인게이지먼트)으로 표현했다. 이는 지배구조 문제로 인해 저조한 주가 성과를 보이는 기업에 관여하는 것으로, 대표적 방법은 포커스 리스트에 해당 기업을 등재해 외부에 공개하는 것이다.
캘퍼스 효과를 처음 알린 보고서는 1990년대 초에 발간되었으며, 이후 몇 차례 갱신되었다. 가장 최근의 갱신은 2015년으로, 보고서는 1999년부터 2013년까지 캘퍼스가 포커스 리스트 등재를 포함한 주주 관여 활동을 진행한 188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조사 결과, 주주 관여 활동이 시작된 기점(그림의 ‘Engage’)에서 이전 3년 동안 누적 수익률은 중소형주 지수인 러셀1000보다 38.9% 낮았지만, 이후 5년 동안의 누적 초과 수익률은 12.2%로 나타났다.
주주 관여 시행 1년 후 초과 수익률은 1.6%로 시작해 2년 후에는 11.2%, 3년 후 13.8%, 4년 후 14.9%의 초과 성과를 기록했다. 캘퍼스는 오랜 기간 기업지배구조 변화에 적극적인 투자자로 활동했으며, 이러한 주주 관여의 지속적인 성공은 양호한 지배구조가 주주 수익을 개선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최근 캘퍼스는 기후변화와 관련한 주주 관여 활동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국민연금, 캘퍼스 효과 기대할 수 있을까
한국 증시 부활을 위해서는 국민연금이 홀로 부담하고 있는 국내 기관 수급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필요하다. 그중 하나는 국내 주식형 공모펀드의 부활이며, 또 다른 방안으로는 후불연금으로 여기는 퇴직연금의 위험자산 편입 비중을 늘리는 것이다. 새로운 정부가 이러한 방안을 추진한다 해도, 오랜 기간 지속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고 한국 증시의 밸류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캘퍼스처럼 국민연금이 주도하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이 요구된다.
전 세계 연금펀드 순위를 보면 일본의 GPIF는 1조7000억 달러(2023년 3월 기준, 약 2470조 원)로 1위이며, 한국 국민연금은 1171조 원(2024년 10월 기준)으로 3위를 차지한다. 캘퍼스는 5030억 달러(2024년 6월 기준, 약 732조 원)로 5위다. 국민연금은 2006년 책임투자 위탁 운용을 시작했으며, 2018년 수탁자책임원칙(스튜어드십 코드)을 도입했다. 연금 사회주의라는 일부 비판 속에서도 국민연금은 꾸준히 주주행동주의의 기반을 다져왔다. 2019년에는 ‘책임 투자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으며, 2023년에는 기존 의결권 행사 지침을 개정해 배당 및 이사회 관련 중점 관리 사안에 기후변화(E)와 중대재해(S)를 추가하며 ESG 강화 행보를 이어갔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캘퍼스 효과는 입증할 길이 없다. 비슷한 활동을 해왔지만, 이를 뒷받침할 공개된 데이터가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문제 기업을 ‘비공개대화 대상기업 → 비공개 중점 관리 기업 → 공개 중점 관리 기업’으로 단계별로 관리한다. 각 단계에서 약 1년 동안 기업에 조치 계획과 개선 대책 수립을 요구하며, 3년 이후에도 개선 여지가 없으면 적극적인 주주 활동을 시작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떤 기업들이 이 리스트에 포함되거나 제외되었는지, 또 어떤 관여(인게이지먼트) 방식이 활용되는지 외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다.
국민연금 운용 정보공개 확대와 주주 행동주의 강화 요구는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왔다. 국민연금도 이러한 요구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적절한 ‘시점’을 찾겠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최근의 고려아연 사태와 상법 개정 논란은 국민연금이 한국 지배구조 개혁을 이끌어야 할 ‘시점’이 도래했음을 보여준다. 머지않은 미래에 한국 증시에서 국민연금판 캘퍼스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