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이 담아낸 나의 동네, 나의 가족, 나의 새벽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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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한성희의 길 위의 미술관
장욱진 편 ②
가족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이 그림으로
덕소에서 12년 후 다시 명륜동 관어당으로
장욱진 편 ②
가족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이 그림으로
덕소에서 12년 후 다시 명륜동 관어당으로
장욱진의 작품들은 일상을 예찬하며 내가 사는 동네, 가족, 동물, 나무, 해와 달이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자연과 나는 다르지 않으며, 하나 안에 전체가 들어있다. 모든 자연은 각자의 자리에서 아름답다. 일상의 마주치는 모든 것은 소중하다고 말한다. 가족과 자연의 일상적 풍경에 한국의 미, 동양적인 정신이 담긴다. 그는 자신만의 전형을 만들어 현대적으로 그려내었다. 도가사상, 민화, 불화, 문인화, 수묵화, 도자화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며 조선의 미를 현대적으로 계승발전 시켜 나간다.
해방 이후 한국의 현대미술은 전통성과 한국성이 화두였다. 서구 미술사조의 대거 유입에 따라 우리 것을 이어가고자 하는 관심이 컸기 때문이다. 세속을 떠나 자유롭게 살고자 한 작가는 그림을 전통 회화의 연관 속에서 점차 단순하게 변모시켜 나간다. 민화를 비롯 전통 회화, 도가적 소재, 전통 수묵화 기법 등을 작품에 활용한다. 자연 일체,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정신세계(체면, 일상, 비교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다시점, 원근법과 비례 간 무시, 입체감과 공간감 상실, 대치 구도와 반복성 등의 특징을 현대적 미감으로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낸다.

김용준이 전시회를 관람하고 '신사실파의 미'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칼럼을 게재한다. "장욱진 그림은 시인, 화가, 문인의 서재에 한 점씩 걸었으면 좋겠다. 시를 쓰다 말고, 그림을 그리다 말고, 글을 쓰다 말고, 잠깐 붓을 멈추고 우스꽝스러운 아이와 나무와 장독과 까치를 한 번씩 바라보고 웃을 수 있는 기쁨이 있다. (…) 이규상의 컴포지션은 다방에, 유영국 그림은 호텔이나 백화점 쇼윈도에, 김환기 그림은 호텔 벽이나 초호화 문화 독본을 간행하는 출판사에 걸어 놓으면 좋겠다"고 썼다. 장욱진 그림은 사람에게 위안과 기쁨을 주고, 김환기나 유영국의 그림은 공간의 품격을 높이는데 좋은 그림으로 보인 듯하다.
작가는 1960년대 초반 서울대 교수를 그만둔 후 명륜동의 삶이 번잡해지면서 별도의 화실을 만들어 생활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덕소 강가 언덕에 작은 화실을 마련하고 12년 동안 홀로 작품활동에 전념하였다.
"나는 고요와 고독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자신을 한 곳에 몰아세워 놓고 감각을 다스려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아무것도 나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그림 그릴 때의 나는 이 우주 가운데 홀로 고립되어 서 있는 것이다."
- 장욱진, 『강가의 아뜰리에』

단단한 물감층을 바탕에 켜켜이 쌓아 올려 화강암 질감이 느껴진다. 암석 같은 질감을 살리기 위해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표현해 낸 것이다. 보관을 쓴 보살의 티 없이 맑고 온화한 모습, 엷은 미소, V자형 계단식 옷 주름, 물고기 지느러미 같은 치마 끝단이 아름다운 작품이다. 고구려 불상 <연가7년명금동입불상>이나 신라시대 만들어진 <금동미륵반가사유상> 83호를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덕소에 전기가 들어오고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다시 명륜동으로 돌아온다. 이때 집과 이어진 한옥을 구매하여 연못을 파고 관어당이라는 정자를 짓고 화실로 꾸민다. 생활은 단순했다. 오로지 그림과 남은 시간은 술로 휴식하는 생활이었다.

그의 단골집은 명륜동 집에서 가까운 우리은행 뒤편 '공주집'이었다. 이곳은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오윤, 오수환 등이 혜화동 부근 미술 교사로 근무하며 자주 가는 술집이기도 했다. 이 단골집은 아직 단층 건물로 남아 현재는 부동산이 들어서 있다.
명륜동 시기 가족과 생활하며 가족 그림을 많이 그렸다. 맨 처음 그린 가족 그림은 1955년 작 <가족도>다. 이 작품은 1964년 반도화랑 개인전에 전시된다. 한일 경제협력 사업 일환으로 방문해 반도호텔에 머물던 일본인 시오자와 사다오에게 이 작품이 판매된다. 그림이 잘 팔리지 않던 시기 부인 이순경 여사는 구매자의 명함을 받아 뒀다. 후에 이 명함은 장욱진 작가와 친밀하게 교류한 김형국 교수가 작품의 소재를 찾아 나서는 단서가 된다. 장욱진은 그림 판 돈으로 둘째 딸 바이올린을 구매하고, 나머지는 서울대 제자인 조각가 최종태와 술값으로 다 써버렸다.

<가족도> 전시 판매를 도왔던 반도화랑은 이대원이 운영(1959~1969) 중이었다. 이대원 작가의 집은 혜화초등학교 근처로 장욱진이 명륜동 거주 시 매일 걸었던 새벽 산책길에 자리한다. 농원의 화가인 그는 장욱진의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 후배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 법학을 공부한다. 이후 부모님이 물려준 파주의 농원을 오가며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고 화가의 삶을 살았다. 1959년에는 아시아재단 후원 종료 이후 반도화랑을 인수하여 운영한다. 외국어에도 능통해서 해외에 김환기, 유영국, 장욱진 등을 소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새벽을 무한히 사랑한 화가는 하루 4시간 이상 잠을 자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했다. 명륜동 시기 새벽 산책을 나갔던 어느 날 혜화동 로터리에서 아동문학 작가 마해송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새벽 산책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후 14년 이상을 교류했다. 마해송 작가도 새벽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성균관대 앞에 살면서 선글라스를 끼고, 강아지를 데리고 밤색 점퍼에 단장을 짚고 매일 새벽 산책을 나왔다. 마치 금방이라도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옛이야기를 들려줄 할아버지와 같았다. 산책 후 두 사람은 혜화동 로터리 지하에 있는 복지다방에서 모닝커피로 하루를 시작했다.

한성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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