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자-공급자 간 기싸움에…"벌금 부과 검토" 초유 사태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
지속가능항공유(SAF) 사업을 둘러싸고 항공사(수요자)와 에너지 기업(공급자) 간에 벌어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논쟁이 전 세계적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수요가 먼저 발생해야 공급이 따라온다'거나 혹은 역으로 '공급이 이뤄져야 수요가 생긴다'는 논쟁이다.

항공사들의 SAF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커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수소 산업 자체가 성장성이 더딘 탓에 수소 항공기 개발이 난항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규제 당국이 항공사들의 SAF 사용을 강제하기 위해 벌금을 매기는 방안을 도입하면 SAF 시장의 성장세가 급물살을 탈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불확실성에 네 탓 공방 벌이는 정유-항공업계

SAF는 기존 석유 기반 항공유와 달리 재생가능 원료 등으로 만든 항공유를 포괄하는 용어다. 폐식용유와 폐팜유, 팜유 부산물 등 쓰레기나 동물성 지방 등 유기물을 정제해 만드는 게 대부분이다. SAF는 기존 항공유에서 배출되는 탄소를 최대 80~90%까지 줄일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다른 장점 중 하나는 기존 항공기 엔진에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항공산업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2.5%를 차지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공업계는 수소를 항공기 연료로 쓰는 방안을 연구하거나 SAF를 섞어쓰고 있다.

SAF로의 전환 움직임은 유럽에서 가장 먼저 시작됐다. 유럽연합(EU)과 영국은 항공사가 사용하는 연료의 최소 2%를 SAF로 채우도록 하는 규정을 올해부터 시행했다. EU는 이 비율을 2050년이면 70%로, 영국은 2040년에 22%로 상향할 계획이다. 항공업계의 SAF 의무화 부담이 비교적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는 의미다.
수요자-공급자 간 기싸움에…"벌금 부과 검토" 초유 사태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
수요자와 공급자 간에 SAF 산업 미래의 불확실성을 놓고 '네 탓 공방'을 벌이고 있다. 항공사들은 SAF 공급량이 부족하고, 그로 인해 너무 비싸다고 불평한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에 따르면 SAF는 전체 항공유의 0.2%(2023년 기준)에 불과하고, 현재 가격은 기존 항공유의 2~3배에 달한다.

반면 에너지 기업들은 SAF 생산 설비 투자에 소극적이다. 항공업계의 장기구매계약 수요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투자 계획 축소 사례도 잇따른다. 셸은 2021년 승인을 받았던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SAF·재생 디젤 공장 건설을 2023년 7월 중단했다. 주문형 생산 방식을 택한 기업도 있다.

주문형 생산으로 불확실한 수요 대응하는 伊기업

이탈리아 에너지 기업 에니는 기존 정유소 한곳을 바이오정유소로 전환해 SAF와 재생 디젤을 함께 생산하고 있다. 이 공장은 연간 40만 톤(약 300만 배럴)의 SAF를 생산할 수 있는, 유럽 내 2위 규모 설비를 갖췄다. 하지만 스테파노 발리스타 최고경영자(CEO)는 “주문이 들어올 때만 SAF를 생산한다”면서 “시장 수요에 따라 생산량을 조절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곳의 책임자 라파엘라 루카르노는 “현재는 SAF 대신 시장이 성숙한 재생 디젤을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생산 비율은 매일 조정할 수 있는데, SAF 비율은 0%까지도 가능하다”고 했다.

마리 오웬스 톰슨 IATA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정유사들이 SAF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모두 멈춰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항공사들은 생산된 모든 SAF를 이미 다 샀고 더 사고 싶어 하지만, 이 시장은 수요 부족이 아니라 공급 부족 시장"이라며 "SAF 자체가 없는데, 항공사들에 그걸 쓰라고 의무만 부과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코로나19 여파로 재정이 어려워진 항공업계는 SAF 장기구매 계약을 맺기 힘든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에너지 기업들은 통상 장기 계약이 확보돼 있어야 생산 설비를 늘릴 수 있다. 루카르노 책임자는 “문제는 가격”이라며 ”SAF는 충분히 있지만, 항공사들이 제값을 내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EU에서는 SAF 미사용 시 벌금을 부과하는 논의도 진행되고 있다. 벌금 수준에 따라 항공업계의 움직임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 로펌 킹앤스폴딩의 프레데릭 라젤 에너지 전문 변호사는 “이론상으로는 비용을 소비자가 부담해야 하며, 항공사들은 이를 항공권 가격에 반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수요자-공급자 간 기싸움에…"벌금 부과 검토" 초유 사태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
유럽 항공 관련 5개 단체는 최근 공동 발표한 넷제로 계획에서 ”SAF 수급에서 에너지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커지는 것이 항공산업의 ‘중대한 리스크’로 떠오르고 있다”고 우려했다. 전기나 수소로 운항하는 항공기를 개발하는 프로젝트는 실현되기까지 아직 한참 멀었기 때문이다.

걸음마 시작한 韓 SAF업계 합동공장 검토

한국의 경우 아직 SAF 전용 생산시설 하나도 없다. 한국에서도 SAF를 둘러싸고 수요가 먼저냐, 공급이 먼저냐 하는 논쟁이 뜨겁기 때문이다. SK에너지의 경우 전용 생산시설 없이 울산공장에서 SAF와 바이오디젤 등을 번갈아 생산하는데, 생산량은 연 1만t 수준으로 알려졌다.

LG화학이 이탈리아 에니와 2027년 완공을 목표로 대산산업단지에서 SAF 공장을 짓고 있지만, 생산물량은 모두 수출용으로 쓰일 계획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 등 국내 정유 4사는 SAF 전용 합작공장 건립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4개사가 대규모 설비를 각각 지을 경우 현재 낮은 수요 대비 SAF가 공급과잉될 게 뻔할 것이란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수요자-공급자 간 기싸움에…"벌금 부과 검토" 초유 사태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
또한 전용 생산시설을 지을 경우엔 현재 낮은 수율(10%)을 60~80%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정부는 정유 4사와 간담회를 진행하며 업계 의견을 청취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다만 해외 기업들의 SAF 전용 공장도 (항공업계) 수요가 안받쳐주는 탓에 가동률이 평균 50% 가량에 불과한 만큼 수요 진작 정책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와 함께 2027년부터 SAF를 최소 1% 섞도록 의무화하는 방안 등도 검토하고 있다.

이 관계자는 "EU는 외항사에도 SAF 의무화를 강제하고 있는데, 한국이 EU 수준으로 엄격하게 할 경우 외항사들이 한국 경유 노선을 줄일 것이란 우려도 있다"고 우려했다. 미국은 의무 사용 같은 ‘채찍’ 대신 세액공제란 ‘당근’으로 SAF 시장을 키우고 있다. 공급을 대폭 늘려 수요를 진작시킨다는 취지에서다. SAF를 1갤런(3.8L) 생산할 때마다 최대 1.75달러를 세액공제해준다. 전 세계 SAF 전용 공장(359개)의 3분의 1(107개)이 미국에 들어선 이유다.

김리안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