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트럼프 2.0 시대’ 막이 오르면서 ESG 투자에 대한 회의감이 커졌다. “기후변화에 대한 우려는 사기”라고 주장해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시 지휘봉을 잡으면서 자연스레 ESG 후퇴 정책이 쏟아질 것이란 의견에 무게가 실린 탓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간 미국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인간이 지구온난화 주범이라는 과학자들의 주장을 일축해왔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전부터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의 녹색금융협의체(NGFS)를 탈퇴,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 등 글로벌 자산운용사 그룹의 ‘탄소중립 자산운용사 이니셔티브(NZAM)’ 탈퇴가 줄을 이은 것도 이 같은 우려를 키웠다.
하지만 발빠른 투자자들은 ESG 주도국인 유럽으로 눈을 돌렸다. 전문가들은 미국과 달리 글로벌 지속 가능 펀드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유럽에서는 ESG에 대한 관심이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전 세계 84% 시장 유럽이 점유
미국 금융정보업체 모닝스타에 따르면 전 세계 지속가능펀드 중 84%를 유럽이 차지하고 있다. 반면 미국의 비중은 11%에 불과하다. 파이낸셜 타임즈(FT)는 “지난 2022년 말 기준 미국 기반의 지속가능한 펀드는 순유출로 돌아섰지만, 전 세계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순유출로 이어지지 않았다”며 “이는 유럽에서의 지속적 유입으로 인해 억제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ESG 회의론, 트럼프 정부의 정책 변화 등이 두드러졌지만, 정작 ESG 제도를 선제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유럽은 분위기가 달랐다는 얘기다.
투자자들이 ESG를 외면했던 이유 중 하나인 그린워싱 문제도 초기에 처방을 내렸다. 실제 이름만 ESG, 지속가능펀드로 포장된 것들이 유럽 당국의 압박으로 펀드 이름을 연달아 교체했다. 유럽이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은 ESG 종주국답게 그린워싱에 대한 반감이 생각보다 컸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의 경우 그린워싱에 대한 우려가 상대적으로 큰 것으로 나타났다.
FT에 따르면 영국 개인 투자자의 67%가 그린워싱을 우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닉 브리튼 AIC 책임 연구원이 “지속가능하다는 ESG의 평판에 입은 피해가 돌이킬 수 없는 정도는 아니지만, 복구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분석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린워싱 선제 대응 나섰다
현재 유럽에서 ESG 투자에 대한 옥석 가리기가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오르탕스 비오이 모닝스타 연구 책임자는 “영국 내 지속가능펀드 수가 상당히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며 “현재 약 400개 펀드가 1년 내 최대 150개까지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미국에서 벌어진 ‘탈퇴 러시’와 다른 정반대 상황이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도 ESG 투자에 긍정적 요인으로 꼽힌다. 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 어드바이저, JP모건 에셋 매니지먼트, 핌코 등을 포함한 미국 자산운용사들이 기관투자자 단체 기후행동(Climate Action 100+)에서 탈퇴한 반면 아문디, UBS 에셋 매니지먼트, BNP 파리바 에셋 매니지먼트 같은 유럽 대표 기업들은 여전히 그룹에 속해 있는 상태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유럽은 아직까지 전 세계 정부가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에서 벗어나려는 니즈를 포착하고 ESG 투자를 이어가는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ESG 접근 방식 재고할 때”
물론 유럽 내 ESG 회의론도 존재한다. 일각에서는 “유럽 내 투자자들이 마케팅 자료에서 ESG라는 단어를 조용히 삭제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돈다. 글로벌 투자 운용사 M&G의 지속가능펀드 매니저 존 윌리엄 올슨은 “ESG는 더 이상 판매 포인트가 아닐 것”이라며 “이제 ESG에 접근하는 방식은 물론 투자자에게 설명하는 방식을 재고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영국에서는 ESG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머릿속 이미지를 묻는 설문에 10%가량이 ‘무의미한’이라는 단어를 꼽았다. 긍정적 이미지를 대표해온 ESG에 대한 인식이 기대 이상으로 부정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 밖에 ‘지속가능한’, ‘책임감 있는’, ‘진보적인’ 등의 응답이 주를 이뤘다.
ESG 개념도 점차 변화하고 있다. 단순 탄소배출권 등 환경 이슈에서 벗어나 생물다양성과 자연자본으로 넓어지고 있어서다. FT는 토양 침식 및 홍수 위험으로부터 보호나 야생동물 서식지 같은 자연 속 자산 가치에 관심이 더 커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 모닝스타에 따르면, 개방형 생물다양성 펀드와 상장지수 펀드(ETF)의 자산규모는 지난 3년 새 2배 이상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결국 “선언적 의미에서 ESG를 넘어 실행력을 보고 평가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준섭 KB증권 연구원은 “블랙록을 포함한 대부분의 금융기관은 NZAM 탈퇴 이후에도 기존 ESG 투자전략과 넷제로 목표를 유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며 “이러한 변화는 ESG 투자가 선언적 의미에서 실질적 성과 중심으로 전환되는 과정”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금융기관들이 정치적 리스크를 회피하면서도 독자적 ESG 전략을 추구하는 것은 ESG가 투자 의사결정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음을 방증한다”며 “향후 ESG 투자는 집단적 이니셔티브보다 개별 기관의 차별화된 접근과 실질적 투자 성과 측정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