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세월이 자기 나이만큼의 속도로 간단다. 더 젊었을 때는 이해 못 한 말이 지금은 참으로 그런가 싶다. 뭐 그냥 그렇게 살아도 될 것이었다. 남들이 사는 것처럼 나 또한 별것 없는 삶이니 그렇게 남들처럼 살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쩌면 별것 없는 삶에 물음을 던졌다. 아니 던져졌다. 왜? 왜? 왜? 나이 60을 바라보는 지금 시점에서 나는 내 삶에 대해 왜? 라는 질문과 함께 멈췄다. 정지다. 더 나아가지 않았다. 답을 얻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더 나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나아가져지지 않았다. 그래서 멈췄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지금 이런 모습으로 여기 있는가? 나는 무엇이기에 그렇게 살았고 또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가? 나의 의지인 것 같지만 나의 의지가 아닌 그 어떤 실체에 의해 사는 것 같은 나, 나라고 생각했지만 때로는 내가 아닌 나, 돌이켜보면 때로는 숨 막히고, 가슴 아프고, 힘겨웠던 삶에서 지금도 그다지 변함없는 것 같은 내 삶의 실체가 궁금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으나 여전히 무엇인가에 붙잡혀있는 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못난 모습에 휘둘리고 있는 나, 나는 누구이며 왜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가? 긴 날을 기도했다. 알려달라고, 알고 싶다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고 애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엇엔가에 떠밀리듯 짐을 쌌다.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집을 나섰다. 일생에 처음이다. 생각나는 한 사람을 만나 맥락 없는 말을 던졌고 그 또한 무작정 길을 안내했다. 무엇이 두렵냐며 무조건 해 보란다. 5시간을 내 달렸다. 그곳이 어디며 어떤 곳인지, 어떤 사람이 있고 또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를 길을 달렸다. 그냥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요즘 매일이 먹고사는 이야기로 넘쳐난다. 먹고 살기! 사는 게 뭔지! 푸념도 하루 이틀이다. 며칠 전 가족 같은 동생들을 만나 사는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이 아프고 힘겨운 삶을 살아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삶에 대한 숙연함으로 한 동안 머물렀다. 사는 게 뭔지! 늘 말이 없이 엷은 미소로 삶을 관조하며, 자기 속상한 것은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속으로 삭이는 동생, 생각이 깊고 이타심이 강한 보석 같은 동생, 단단하고 고집스러운 성격은 이러한 자신의 의지를 더욱 강하게 붙잡고 있어서 그 아픔이 극심했을 것을 알기에 동생의 아픔은 내 가슴도 아리게했다. 수년을 알고 지내 온 동생의 성품에서 툭 튀어나온 “점쟁이를 찾아 가 볼까 했어요”라는 말은 그 자체로 아픔이었다. 구안괘사(얼굴 신경 마비 증상, 입과 눈이 한쪽으로 틀어지는 병)에 중풍 뇌졸중(반신불수) 증상까지 있다는 말에 억장이 무너져내렸다. 병원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하니 이 모든 증상의 원인이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초기에는 진급도 잘 되고 이사직까지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여서 다행이다 싶더니 마음고생도 그만큼 극심했던 터였다. 누나로서 이 지경까지 된 동생에게 죄스런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이라도 말 나온 김에 사주 좀 보자고 했고 펼친 동생의 삶은 ….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그 힘겨운 삶을 성실함과 뚝심으로 버텨왔음을 알 수 있었다. 너무나 속이 상했다. 지금에 와서 이미 경험해버린 아픈 삶을 돌이킬 수 없으니 그저 아타까울 뿐이었다. 지금이라도 빨리 벗고 아직 젊고 힘과 지략이 있으니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고 즐겁게 훨훨
요즘 혜민 승려와 현각 승려와의 공방으로 sns가 시끄럽네요. 가끔 들여다보는 페북에 심심찮게 그들의 이야기가 오르내려서 뭔가 하고 들여다봤더니 참으로 시답잖은 말 장난(?)으로 보여서 피식 웃었습니다. 제가 웃은 이유는 ‘뭐 그렇지’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뭐 그렇지’라고 생각한 대는 저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호칭입니다. ‘승려’를 ‘스님’이라고 일괄해서 부르는 것부터가 문제입니다. 사실 어떤 ‘직’에 대해서 ‘님’자를 붙이는 것은 그 사람이 그 ‘직’에 합당하게 행동할때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사전에도 “스님은 승려가 자신의 스승을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좋은 게 좋은 것(?)이러는 생각이 머리깍고 승복만 입으면 지나개나 다 ‘스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다보니 승려도 못 되는 ‘중’같지도 못한 인간들도 모두 ‘스님’이라 불리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중도 못되는 자신을 일컬어 ‘ㅇㅇ스님입니다’라고 소개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런 것들에 매우 민감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인간의 본질과 그 운행과 함께 띠라오는 행실의 어떠함에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바로 제대로 수도하는 자라면 자신을 소개함에 있어서 “저는 출가 수행자 ㅇㅇ입니다”하고 소개해야 옳습니다. 그가 속칭(속칭라고 하는 이유는 절이 커야할 이유도 없고 큰 절이라는 것 가체도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모든 종교에 동일합니다) 큰 절의 주지여도 그
사주팔자(‘사’는 생년월일시, ‘주’는 기둥 주, ‘팔자’는 네 기둥에 속해 있는 오행(목화토금수)의 음과 양의 수)는 한 사람의 삶의 바탕이 되는 근본요소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응애하고 태어날때 받아드는 생년월일시의 영향을 받으면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사주팔자만 잘 연구하여 풀줄 안다면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삶의 모습을 알 수도 있고 계획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안다는 것의 의미는 과거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받고, 현재의 삶을 이해하며, 불학실한 미래에 대한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에 좀 더 지혜로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삶을 결정하는 많은 요소들 중에서도 현재를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직업을 선택하는 일일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는 반드시 재화를 많이 벌고 못 벌고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삶의 의미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듯이 많은 사람들은 불학실한 미래를 설개하는 일이 가장 난해한 일입니다. 세계정세의 흐름이나 한 국가가 지향하는 가치의 흐름 혹은 개인의 삶의 철학의 기준으로만 한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아무리 좋은 직업군이고 미래를 보장하는 일이라고 해도 그것이 자기와 맞지 않는 일이라면 설령 두뇌가 혹은 상황이 되어 그 길을간다해도 그 자신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이 문제를 알고도 우리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또 미래에도 너무나 많은 실수를 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 혹은 내 아이가 어떤 일을 선택해야 싫증내지 않고 즐겁고 행복하게
최근에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복합공간이 마음에 들어서 자주 이용하고 있다. 음식이나 커피를 사지 않고 몇 시간이든 그 공간에 있어도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데다가 차로 이동하는 나로서는 주차료가 무료인 것이 가장 큰 혜택이다. 독서용 스탠드를 설치해 둔 책상들도 있고, 많은 가족이나 혼 밥을 하는 사람들도 한끼를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형태의 테이블이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편의 시설로는 1층 복합공간에 함께 있는 식당들과 지하에 두 개 층으로 나누어져 있는 마켓과 8개 층의 지상 주차장이 전부다. 심지어 이곳 마켓에서 판매되는 식품 가격은 코스트코 가격대비 최저가 정책을 시행하고 있어서 오전에 가면 신선한 제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다. 대기업이 왜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마음에 드는 공간이다. 다른 곳에 비해 이 지역은 집값이 저렴한 편이어서 신혼 부부들이나 혼자 사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그러다 보니 이 공간은 주로 가족 단위의 젊은 부부들이 많이 이용한다. 평일에는 더구나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보니 낮에는 애기 엄마들이 삼삼오오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미세먼지와 아파트의 층간 소음 스트레스 없이 마음껏 뛰어 놀게 한다. 나도 미팅이 있으면 주로 이곳을 이용하고 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는 좁고 답답한 실내 보다는 넓고 쾌적한 이곳을 주로 찾는다. 이곳에 있으면 우리나라가 저 출산 국가가 맞나 싶을 만큼 취학 전 아이들이 많다. 다소 버거운 층계를 네발로 기어 올라가는 모습이나, 그 짧은 한 발로 층계를 내려가다가는 영락없이 굴러 떨어질 것이 뻔한 일인데도 그런 위
우리사회에 기울어진 운동장을 이야기 하자면 글도 쓰기도 전에 화부터 난다. 솔직히 어디하나 성한대가 없으니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난감하다. 국민들의 의식이 변하고 주장이 받아 들여져서 일부분은 과거보다 나은 듯 해 보이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변화는 크지 않다. 아마도 기대치가 높아서 작은 변화는 변화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싶지만 케케묵은 고릿적부터 쌓여온 문제들이 한 순간에 해결 될 거라고는 기대도 안 한다. 이리 단호하게 말하지만 그래도 찜찜한 뭔가가 자꾸만 남는 것은 변화에 대한 미련이다. ‘이혼해!’ 라고 소리 질러도 법원으로 당장 쫓아가지 못하는 처절한 미련 같은 것이 게다. 하지만 빌고 빈 소망이 간절함으로 모이고 모이면 하늘을 움직인다는 선조들의 말씀들을 부여잡고 오늘도 두 손 모아 머리를 숙여 기도해 본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되게 해 주소서’ 얼마 전에는 프랜차이즈 사업자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광화문 앞마당에 모였다. 하나님 위에 건물주, 건물주 위에 가맹점주가 있다는 현실에 대한 한탄이며, 경기 악화와 최저임금 상향조정은 타는 불에 기름을 부었다. 택시 기사들이 카카오의 횡포에 반기를 들며 머리에 띠를 하고 주먹 쥔 손을 뻗어 하늘을 찔러댔다. 밥그릇 싸움이 치열하다. 이 모든 것들은 광화문 앞마당의 비애다. 임금의 큰 덕(德)이 자신들에게 비추어 소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갖가지 불꽃으로 타오른다. 승자와 패자가 모두 공존 하는 곳, 때로는 고통으로 부르짖고, 때로는 환희로 노래하는 경복궁 앞마당은 그런 곳이다. 그들의 뜻은 온전히 임금을 향해 있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언제까
반백년 넘어 살다보니 한 해 한 해에 대한 평도 조금은 가능해 지는 것 같다. 어떤 해는 그저 그렇게 별 일 없이 지나가기도 했고, 또 어떤 해는 죽나 싶을 만큼 힘든 일들로 인해 어찌 살았는지 또 살고 있는지 누가 물을까 피해 다닌 해도 있었다. 두문불출하고 자신만의 시간에 매몰되어 세상의 세월이야 거꾸로 가든 날아가든 내 알바 아니었던 해들도 있었고, 그저 늘 오늘만 같기를 소망한 해도 있었다. 인간의 삶을 무엇이라 정의 할 수 없듯이 한 해 살이 또한 예상할 수 없는 것이 인지상정일 듯, 그렇게 보내고 또 맞으며 우리는 약속한 해를 산다. 마음이야 늘 행복하기를 소망하지만 소망이 삶이 되는 것이 어디 쉬운가? 그러기에 기원하고 또 빌고 빌어 그러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행복하세요. 복 많이 받으세요. 소원성취하세요.’ 과거 사상가들이 무한한 우주의 운행을 해와 달로 쪼개고 날과 시로 쪼개지만 않았다면 우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음에 불안 할 수도 있겠으나 오히려 지금보다는 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인간사 나고 살고 죽는 것에 계획이 좀 없으면 어떻고 예측이 불가 하면 어떤가. 예측한다고 뭐가 얼마나 달라질까? 계획을 세운들 그 계획의 몇%를 성취하며 산다고. 짜임세가 좀 덜하면 어떻고 불안정한 틀을 만들어 끼워 넣는 다는 것이 무슨 큰 의미란 말인가? 인간이 자신의 불안을 줄이기 위해 많은 장치들을 개발하여 그것을 ‘과학’이라 으스대며 ‘발전’이라 부축이고 ‘성장’이라며 죽기 살기로 매달려 혼신을 다해 일해 왔다. 결과는 아직 미정이며 그것들의 부작용들로 인해 예상치 못한 것들로 인간이 죽어 가고 있다. 지금 혹은 서서히 그렇게. ‘인간
세월을 살다 보면 삶이 반복됨을 세삼 느낄 때가 있다. 마치 나는 절대로 그런 시절을 살지 않을 것 같던 일들이 떡 하니 눈앞에 서 있어서 당혹스러운 경험을 한 번씩은 해 봤을 것이다. 그럴 때면 우리의 생각은 자주 세월과 나이를 들먹이며 과거로 갔다가 미래로 갔다가 분주해 진다. 말 나온 김에 과거의 삶을 따져보면 나 또한 자손을 안고도 남을 나이를 살고 있지만, 또한 어른들이 자주 말씀하시듯 생각은 아직 청춘에 머물러 있음이 사실이다. 하지만 역시 생각은 생각일 뿐 자식들은 쑥쑥 자라 자기 짝들을 생각하는 나이가 되고 보니, 이제는 시집 장가보내는 일이 남 일이 아니게 다가온다. 내 나이 18살 즈음, 어느 가을날, 하교 길에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가 젊은 남녀가 다정히 가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저 여자는 얼마나 많이 배우고 예쁘고 훌륭하기에 남자가 선택했을까?’ 다정히 걷는 젊은 남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며 나는 줄 곳 그들을 바라보며 되뇌었다. ‘나를 선택해 줄 사람이 있을까? 나는 얼마나 공부하고 또 얼마나 훌륭해야 할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내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머리를 숙이고 걷던 그때 그 일이 지금도 잊혀 지질 않는다. 얼마 전에 아는 아이가 장가를 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이 참으로 찹찹했었다. 그 아이의 성장을 모두 보아 온 터라 할 수만 있다면 혼인을 말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된 생각이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물로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장가를 간다는 그 아이, 어린 시절 그가 어떤 행동을 했으며 어떤 부모 밑에서 어떤 양육을 받았는지 너무나 잘 아는 나는 장가를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종종 시비에 휘말릴 때가 있다. 사실 처음 시비의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상대가 자신에게 행한 언행인데, 그가 자신에게 막말을 했다거나, 비난을 했다거나, 거짓을 말했다거나, 무시하는 언행을 했다거나 등이다. 그래서 시비를 잠재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비가 붙은 그 처음 상황에서의 시발이 되는 그것! 에 주목하면 해결은 쉬워진다. 문제가 된 언행에 대해 사과하고 그 사과를 받아들이면 갈등은 오히려 쉽게 해소할 수 있다. 문제 해결을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타이밍이다. 문제요인이 발생했을 때를 기점으로 최대한 빠른 시간에 그 문제 언행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다. ‘모든 것에 앞서 그 언행은 잘 못 되었다. 생각이 부족했다. 상처 받지 마시고 너그러이 용서해 달라’고 한다면 그 문제는 100%는 아니더라도 90%이상은 해소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신속하고 구체적으로 사과했음에도 불구하고 10%의 불편함은 남는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특성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그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언행을 했을까? 내가 정말 그 사람이 말한 것처럼 하찮은 인간인가?’ 라는 생각들로 시작해서 그 언행을 한 사람의 외모, 능력, 추산되는 재산정도, 지위 등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가 자신의 자존감 정도에 따라 상대에게서 비난할 거리를 찾거나, 혹은 자신을 향한 비하거리를 찾는다. 물론 대부분의 갈등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미 갈등이 시작된 사람이라면 그러한 생각은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물어 처음 상황의 단순성을 넘어 복수의 감정으로까지 스스로를 몰아갈 확률이 높아진다. 인간은 생각하
한진그룹의 명도 다했나보다. 딸들에 이어 부모들까지 그들의 추악한 인간성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최순실을 경험하면서 못된 강남 아줌마들이 연일 도마에 오르더니 못된 그룹 일가가 도마에 오른다. 그룹 일가의 횡포들이야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들의 추악암이 드러나는 양상과 바라보는 시각은 분명 예전과 다르다. 나는 미투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근본 욕구인 성문화의 추악한 단면이 드러날때 이제는 더이상 망설이며 드러내지 못 할 것은 없겠다 짐작했다. 사실 인간의 성행위 만큼 민감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개인의 일탈과 관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마치 속을 몽땅 뒤집어 보이는 것 같은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런 무겁고,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그래서 더 비밀스러웠던 지극히 사적인 일들에 대한 아픔이 사회적 인식으로 공인되고, 수용되고, 더불어 공감과 지지를 얻게 된 것은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큰 대 변혁이다. 이렇게 미투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인식의 대 변환은 여태껏 약자로 가슴 앓이만 하던 수많은 암흑사들을 하나 둘 들추어 내는 것에 용기 백배의 힘이 되어 주고 있다. 마치 해일이 바다밑까지 뒤집어 생물들이 새로운 환경 속에서 건강한 삶을 이어가듯이, 과거에는 누구도 입밖에 꺼내지 못했던 뿌리 깊은 사회악들이 더는 덮히거나 묵인되지 못하고 수면위로 떠올라 묵은 상처들에 다시 생체기를 내지만, 기꺼이 참아내며 오랜 울분들을 뱉어낸다. 촛불로 세운 정권이 주는 힘이다. 이 용기는 오래 묵어 곰삭은 찬거리들이 갖는 내공과 같이, 쉽게 사그라지거나 섲불리 나불거리는 순간적이거나 가벼운 그것이 아니다. 오래도록
날씨가 좋으면 미세먼지가 기승, 날씨가 우중충하고 스산하면 대기 질이 좋다니 아. 어쩌란 말인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서울시장 후보 중에 대기 질을 개선 시킬 확실한 방안이 있는 사람은 당선자가 될 지경이다. 살다가 살다가 이런 일로 고민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중국이 우리랑 붙어 지낸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예전에 없던 일이 지금에 와서 왜 이리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는지 분명 그동안 뭔가 변화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중국 요인으로 지목되는 사막화의 급증, 공장의 외곽이전 설립 집중, 국내 요인으로 지목되는 자동차 수요량 급증으로 인한 배기가스 배출 증가 등으로 인한 얇아진 오존층까지. 재력가들이 NASA가 밝힌 우주 호텔에 주목하듯 정말이지 이제는 지구를 떠야 살아야 하는 시점이 된 건 아닌가 싶을 만큼 고민이 깊어진다. 가임기 여성들은 육아비용이 부담되어 아이를 낳을 수 없기도 하지만 심각한 대기 질 때문에도 아이를 낳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흘려들을 말이 아니다. 우리가 언제 공기 때문에 삶을 고민하고 살았던가? 과학의 발전이 낳은 병폐다. 편하고, 유용하고, 실용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과학은 비로소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좀 더디고, 좀 불편하고, 좀 아쉬운 것에서 오는 유용한 것들과의 이별이 가져다준 벌이다. 하지만 이미 좋은 것을 맛본 인간에게 퇴보나 회기는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당장 쓰러져 죽어버리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 문제를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미 예견된 결과를 보더라도 더욱 그렇다. 답은 하나다. 발생 원인을 없애거나 줄이는 것이다.
‘세월호 7시간의 진실’에 대한 의문은 세월호 대참사가 일어나면서부터 끊임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도대체 그 골든타임에 대통령은 뭘 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 질문의 핵심이었다. 성형시술 중이었을 것이다. 시술 후 마취가 덜 풀려서 자고 있었을 것이다. 혹시 모를 부정행위들에 대한 추측은 일파만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 나갔고 대통령에 대한 불신은 하늘을 찔렀었다. 신뢰할 만한 어떠한 답변을 내놓지 않는 혹은 못 하는 박근혜 측근들에 대한 원망은 그녀를 대통령이라 부르고 싶지 않을 만큼 참담했다. 무엇이 진실일까? 왜 말하지 못하는 걸까? 유가족은 물론 국민도 그 진실을 알아야 했다. 그것은 단순히 의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그 물음은 억울하게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의 최소한의 알 권리였고 갑자기 가족을 잃은 유가족의 당연한 의문이었다. “알고나 보냅시다. 왜 죽었는지. 내 아이가, 내 가족이 왜 죽어야 했는지” ‘세월호 7시간의 사건’에서 드러난 진실은 박근혜에게 대통령의 자리는 처음부터 백성 위에 군림하는 독선적 군주의 자리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행적이었다. 자신이 나라의 녹을 먹는 공무원이라는 생각은 한순간도 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공무원이라고 생각했다면 출근 시간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근무시간에 성형시술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감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말단 공무원들은 과중한 업무로 인해 과로사로 죽어 나가는 현실에서 대통령이라는 가장 큰 책무를 담당하는 고위 공무원은 할 일이 없어 근무시간에 늦잠을 잔다?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문고리 3인방(안봉근, 이재만, 정호성)은 알고 있었다. 사고에 있어서 골든
기독교가 이러한 논리를 펴면서부터 여자는 더욱 설 곳이 없어졌다. 여자는 끽해야 남자의 갈비뼈 두 개? 여성비하의식은 기독교가 최악이다. 성서의 그 어느 곳에도 무리의 수를 헤아림에 있어 여자는 없다. 아이도 사람으로 취급되지 못했다. 왜? 누가? 무슨 권리로? 남자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여자를 만든 남자들의 하나님이? 기껏 인류를 구원하러 오셨다는 그 하나님조차도 여자와 어린 아이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신이 목적하는 그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왜? 기독교인이라 자칭하는 여자들은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일까? 논리에 맞지 않는 이론으로도 인류가 이 만큼이라도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가 여자들의 너그러운 아량 덕이라는 사실을 남자들은 알까? 초기 인류는 결코 기독교식의 구분 짓기와 같은 주장을 하지 않았다. 최소한 그들은 그랬을 것이다. 그들의 영혼만큼은 순수하고 맑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자의 일을 했고 그저 그렇게 함께 살았을 것이다. 기독교가 남자와 여자를 갈라놓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을 것이다. 종교철학자들이 가증스럽게도 자신들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기준을 정하고, 가치를 매기고, 의미를 부여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그저 함께 둥글둥글 사는 것이 삶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오히려 초기 인류는 여자를 두려워했다. 한 달에 한 번씩 그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 내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여자들은 자신들과 다른 존재, 아니 더 우월한 존재라 여겨 ‘대모신’을 만들어 추앙한 문헌과 조각상들이 이를 증명한다. 언제부터 남자가 이리 오만해지고 교만해졌는가? 그 시점을 생각해 봐야한다. 남자! 그들이 만든 세상! 과연
2018년도,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에도 우리는 이렇게 우리가 정한 날들을 하나, 둘 세면서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결의를 다잡으며 또 그렇게 살 것이다. 새로움! 새로운 것이란 있는가? 2천여 년 전 성서 철학자들은 이미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규명했다. ‘이미 오래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듯이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다고 했다. 그저 망각만이 지금의 그것이 새로움이라고 인식하고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끊임없이 새것을 이야기한다. 새해, 새날, 새로운 가치, 새로운 삶… 무수히 많은 ‘새로운’이라는 명제를 거론하며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러함의 목적을 향해 매진하기를 주문한다. 새로움! 그 새로움은 과연 무엇으로부터의 새로움인가? 환경의 변화, 조건의 변화, 체계의 변화, 규정들의 변화만 새로움일까? 오히려 이러한 것들로의 새로움의 가치를 세우는 일은 쉽다. 실상은 그 또한 과거로의 반복이겠지만 그렇다. 종교에서는 특정 의식을 통해 ‘다시 태어남’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과거와 현재의 삶에서 지금부터 미래에는 전혀 다른 삶을 살기를 주문한다. 그것은 삶의 방식, 가치의 전환,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는 대대적인 변혁을 요구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억울하고 불합리하고 부조리했던 과거 사건들을 들추어내어 지금 시점에서 낱낱이 살피고 재정립하겠다고 천명했고 2018년 1월 14일 드디어 ‘권력기관개혁방안’을 발표했다. 청와대는 이날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과 밀양 송전탑 반대 시위,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시위, 평택 쌍용자동차 농성, 용산 화재
천재지변인지 인재가 불러온 참사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진이라는 현상은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불가한 상황인 것은 틀림없다. 하루빨리 흔들림 현상이 안정되고 이재민들도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모든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정부가 마음을 일으켜 이렇게라도 개인의 사생활을 배려해준 것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문재인 정부에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지난 정부에서의 세월호 가족들은 3년여 동안이나 이 작은 배려조차도 받지 못했고 마치 옷을 모두 벗고 광야에 나가 앉아 있는 듯한 불편함과 수모를 겪어야 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개인이 나라를 이루고 살면서 함께 십시일반 사비를 털어 세금을 내는 이유도 개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이러저러한 문제들에 대해 그 고통을 적절히 나누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정부들을 경험했었다.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고 그것이 정부 역할의 한계일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이해도 강요당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나라를 잃고 살아온 과거 우리 조상들의 뼈아픈 한이 대물림되어 작금의 현실에 적응하는 법을 너무 빨리 배워버린 탓일 것이다. ‘나라를 나라답게’라는 다소 모호한 슬로건을 내건 문재인 정부의 출범은 ‘나라다운 나라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실체를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첫술에 배부른 일은 없다. 먹고 또 먹다 보면 배는 불러 질 것이다. 하지만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는 말이 현실이 되어 더 많은 과도한 요구들을 끊임없이 하는 마치 만족을 모르는 배부른 돼지처럼 될까 앞선 우려도 되지만 걱정을 앞당길 필요는
< 존재와 죽음의 기술> 인간의 탄생은 선택의 여지 없이 주어진다. 그것이 운명이든 필연이든 누구도 자기 삶의 환경을 선택하지 못한다. 외부적 환경도 내면적 환경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다. 그 주어진 환경을 살아 내야 하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는 이 근본적 물음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저 주어졌으니 사는 것으로 알고 살았고 또 그렇게 살도록 가르쳤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부모도 어린 자식을 앞에 두고 진지하게 이 문제를 고민하지 않았다. 울면 젖 주고 기저귀 갈아주고 안아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놀아주고 그렇게 아이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만으로 부모의 역할이 다 된 줄 알고 살았다. 지금도 그렇다. 선택의 여지 없이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맞닥뜨려지는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못 한 채 나이를 먹는다. 한 살, 두 살…10살… 또 그렇게. 말을 알아들으면서 할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라면서 접하게 되는 규범들을 익히는 대에 점점 최적화되어 간다. 크고 작은 사회집단들에 들어가면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규범들을 잘 지키도록 훈련되면서 자신이 왜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놓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할 겨를 없이 40이 되고 50이 되고 또 70이 되어 버린다. 이제는 이런 질문을 받는 것이 어색하고 낯설다. 어쩌면 인간은 그렇게 어리석다. 자신이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 채 살고 있으니 말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불편함에 대처하는 방법을 근근이 알려주는 것으로 최선이라 생각한다.
< 특별한 경험, 이데아> 여타 동물과는 달리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가장 큰 특성은 생각하는 그것도 아주 깊이 생각할 줄 아는 동물이라는 점이다. 아주 깊이. 그런데 그 깊이가 많은 부분 한 쪽으로 치우친다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깊이라는 것이 갖는 또 하나의 맹점이다. 한 우물 파기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불편한 인식이다. 뭐라도 끈기 있게 지속적으로 매진해야 결과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인식(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앎) 차원으로 넘어 온다면 한 우물 파기는 상당부분 위험성을 갖는다. 인간의 인식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인식으로 인해 파생되는 경험들도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에 그렇다. 특히 이념이 그렇다. 철학적 방식으로의 설명을 빌리면 이념은 순수한 이성에 의하여 얻어지는 최고 개념으로 플라톤에게서는 존재자의 원형을 이루는 영원불변한 실재(實在)를 뜻하고, 근세의 데카르트나 영국의 경험론에서는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 내용, 곧 관념을 뜻하며, 독일의 관념론 특히 칸트 철학에서는 경험을 초월한 선험적 이데아 또는 순수 이성의 개념을 뜻한다. 이데아나 이성 개념이 여기에 포함이다. 말이 좀 어렵지만 철학적 사조(한 시대의 일반적인 사상의 흐름)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갖고 있던 종교적 인식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에 다소 종교적이며 신적인 해석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존재자의 원형’, ‘영원불변한 실재’ 들과 같은 이데아적 해석들이 그러하다. 이데아(idea)는 플라톤 철학의 중심 개념으로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되는 항구적이며 초월적인 실재를 뜻하는 말이다.
< 다 주고 더 주는 것이 서비스다> 우리나라에 서비스 문화가 들어 온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는 서비스고 뭐고 그저 먹을 것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고 돈이 있어 그나마 조금 더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면 감사할 일이었다. 생활 형편이 나아지고 경제 수준이 올라가면서 만연되어 버린 일상은 더 나은 삶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서비스! 이제 우리는 그저 먹는 것 좀 더 나은 것을 갖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인간다운 삶이란 존중받는 삶이다. 인간의 궁극적 삶의 가치가 자아실현에 있다는 것은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 보임으로써 타인으로 하여금 존중을 받고자 하는 심리의 발현이다.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긍정 혹은 부정적으로 활용할 의도로 만들어 낸 것이 ‘서비스’라는 단어다. 서비스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제일 먼저 기분이 좋아 진다. 받고 더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인간심리는 생활 전반에 걸쳐 여러 분야에서 적극 활용될 가치는 충분하며 욕구를 극대화하고 가치를 높이는 것으로는 절대적이다. 그것을 부정하거나 소외 시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는 것은 분명히 악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우리가 자주 ‘저가’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이용하고 있는 김밥전문점이 있다. 이런 음식점에 이제는 대부분 당연하듯이 붙여놓은 “물은 셀프” 라는 문구다. 10여 년 전에 이 문구는 많이도 낯설었지만 이제는 으레 당연한 인식이 되어 누구도 이 문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네 스스로 물을 가져다 먹는 대신 우리도 인건비 절감 비용만큼 음식비용을 줄여주겠다
‘대한민국이 어찌 만든 나라며 어떻게 쟁취한 민주주의인데 이런 하찮은 여자가 감히 꼭두각시를 내세워 제멋대로 이 나라를 쥐락펴락 했단 말이야? 4년 동안 말도 안 되는 불행과 불편함들에 이 여자가 있었단 말이야? 그동안 박씨는 뭐했어? 이들의 농간에 놀아난 나는 뭐지? 우리는?’ 지난겨울 1천 5백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나라가 이렇게 썩어 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삶의 무게 때문에 방치했다는 죄책감과 현실의 처참함으로 인해 살을 애듯 추운 거리로 나섰다. 시간이 갈수록 밝혀지는 최씨를 둘러싼 내용들은 엄청난 수치와 굴욕이었다. 참으로 암담한 심정에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한 시민들은 일과에 지치고 삶에 지치고 가치에 지쳐서 참으로 힘든 겨울을 보내야만 했다. 그렇게 맞이한 문재인 정부출범 19일이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시민들의 기대는 높다. 지난겨울 시민들은 시민의 의미와 국가의 의미를 깊이 새겼고 다시는 이런 굴욕은 경험하지 않겠다 결의를 세웠기 때문이다. 지금 시민들은 문재인 정부의 인선을 보고 있다. 잘 한다 칭찬일색이며 수치스러웠던 지난 세월을 다 잊을 수 있을 만큼 만족스러워 한다. 주변에서도 모두 잘하고 있다며 기막힌 인선이라고 말하고 나 또한 당파를 초월한 새로워진 인선에 대해 감격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늘 지켜보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나의 지켜봄은 ‘잘하나 어디보자’가 아니다. 그런 태도는 비난과 판단을 전재로 한 부정적 의미라면 나의 ‘지켜봄’은 부딪히는 난관들에 대해 문재인 정부가 어떻게 대처해 나가는지를 살펴보겠다는 것이며 거기에 나의 몫이 있다면 어떤 형태로든 함께 하겠다는 것이다. 내가 이런
정말 실망스럽다.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들을 지도자로 믿고 국민으로 있었다는 것이 정말 치욕스럽다. 대통령의 지지가 5% 대로 하락하고 국민의 5%를 제외한 모든 국민이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상황에서 나온 사과문이라고 믿기에는 귀가 의심스럽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예측 가능한 정도의 내용을 가지고 대국민담화라고 들고 나왔다. 거기에 더해 신세 한탄까지! 작금의 담화문 내용은 구체성은 없고 감성에만 호소하는 무식한 동네 아줌마들의 대화에서나 있을 법한 내용 수준이다. 물론 아줌마 전부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은 진정 국민을 우롱하는가! 국민이 어디까지 가기를 바라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대통령은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의 인식은 그 사람을 존재하게 하는 그 자체다. 인식이 불분명하면 행동도 불분명하게 된다. 이번 대국민담화문은 그야말로 ‘담화’로 대통령 자신의 ‘견해’를 밝힌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이 사과문이기를 바란 국민의 잘못이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번 담화문의 내용은 사과문의 흉내를 냈지만 그것은 일련의 사태에 대한 변명문, 핑계문, 남탓문이었다. 사과문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사과문을 쓰는 요령이라도 물어보고 쓰는 성의는 보여야 했다. 정말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자괴감이 심하게 든다. 우리가 대인 관계를 하다보면 사과할 일이 자주 생긴다. 그런 사과를 무시하고 대충 얼버무리면 관계는 오해를 낳고 결국 단절을 가져온다. 살면서 실수로 혹은 고의로 타인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의도나 생각에 반한다면 바로 사과해야